사람이나 마찬 가지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거나 환경적응력이 높은 기업은 수명이 길다.
반면 태생자체에 문제가 있었거나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기업들은 쉽게
쓰러진다.
한국 기업의 성쇠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훨씬 극심했다.
지난 65년 국내 1백대 기업 중 97년까지 생존한 기업은 13개에 불과했다.
30년간의 생존율이 13%에 그쳤다.
미국(21%)이나 일본(22%)에 비해 훨씬 낮은 수치다.
65년 당시 10대기업 중 97년에도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하나도
없다.
그룹으로 보더라도 60년 당시의 위치를 유지한 그룹은 삼성과 LG뿐이다.
경쟁도 치열했지만 기업환경이 그만큼 열악했다는 뜻도 된다.
한국의 산업은 기업들이 이런 어려운 환경을 깨쳐나오는 가운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종업원 5백명 이상의 공장은 55년 18개에 불과했다.
97년에는 5백여개로 늘었다.
상위 30대기업의 평균 매출액은 65년 당시 13억원이었다.
97년에는 9조원이 넘었다.
매년 평균 30% 이상씩 늘어온 것이다.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뤘다.
50년대 소비재산업 일변도였던 산업구조는 이제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조선
등으로 고도화됐다.
반도체 등 일부 품목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세계시장에서의 지위도
높아졌다.
기업들은 이처럼 짧은 기간에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한국 산업을
끌어올렸다.
클라이맥스를 지나자마자 IMF의 충격 앞에서 비틀거리고는 있지만 이
정도로도 세계인에겐 "기적"같은 일이다.
이를 두고 미 MIT대 폴 새뮤얼슨 교수는 "그리스의 고전적인 비극을 닮았다"
고 했다.
일제강점기간에도 기업은 있었다.
그러나 기업들이 사업기회를 잡고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부터로 봐야 한다.
당시는 절대적인 물자부족 상태였다.
면방직 제분 제당 등 소비재 부문에 진출한 이들이 돈을 벌었다.
일부는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기초적인 설비시설과 사업기회를 얻었다.
특히 정부보유 달러를 배정받은 수입업체들이 환율 과대평가에 힘입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기업들은 또 전후 복구과정에서 귀중한 사업.경영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운수.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서비스업과 수입대체 소비재 산업 등에서 기회가
많았다.
전후복구와 원조경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정부와 은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당시 10대 그룹은 삼성(이병철) 삼호(정재호) 개풍(이정림) 대한(설경동)
락희(현 LG.구인회) 동양(이양구) 극동(남궁련) 한국유리(최태섭) 등의
순이었다.
이 가운데 삼호는 지금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개풍의 경우는 얼마전에 법정관리에서 풀린 대화유화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60년대~70년대초는 기업들이 정부의 경제개발 파트너로서 도약했던 시기다.
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에 정부와 기업 사이에 생산적인
협력관계가 싹트기 시작했다.
박정희정부는 처음에는 대기업들을 부정축재자로 배척했다.
그러나 기간산업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대기업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차관유치 사절단으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대기업이 앞장서서 사업과 시장을 개척하고 정부가 이를 독려하는 한국식
성장방식이 이 시기에 형성됐다.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산업화에 참여했다.
섬유 합판 가발 등 노동집약적 수출품목을 중심으로 성장해나갔다.
이때는 동명목재 금성방직 판본방적 경성방직 대성목재 동일방직 제일제당
등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었다.
기업들은 이와함께 전자 자동차 합섬 등 신규분야로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한국 산업계의 모순도 이때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
투자재원의 부족과 정부 중심의 금융자원 배분으로 인해 기업은 외부차입에
의존해 확장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기업의 전체 자금조달 중 외부자금 비중이 70%를 넘었다.
결국 60년대 후반 들면서 쓰러지는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69년 30개, 70년 56개의 부실기업을 정리했다.
삼호 화신(박흥식) 천우사(전택보) 등이 이때 도산했다.
72년께에는 10대 재벌의 순위가 삼성 럭키(현 LG) 한진(조양호) 신진 쌍용
(김성곤) 현대(정주영) 대한 한화(김종희) 극동 대농(박용학) 등으로 바뀐다.
지금과 같은 대기업 구조가 뿌리를 내리게 된 시기는 70년대 중반이다.
그 계기는 73년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이었다.
기업들은 초기에는 투자재원과 위험을 우려, 소극적이었지만 7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금융.세제상 정부지원도 있었다.
대기업간 외형을 둘러싼 경쟁의식이 작용하기도 했다.
정부가 7개 종합상사를 지정한 것도 이 시기다.
80년에는 종합상사를 통한 수출비중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또 75년 시작된 중동건설 특수는 국내기업의 해외사업 확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75년 7억5천만달러였던 건설업체들의 중동건설수주액은 3년후인 78년에는
79억8천만달러로 10배 이상 늘었다.
80년대초 불황과 중화학 투자조정이라는 시련을 겪었지만 국내기업들은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진출하여 한 단계 더 도약했다.
80년대 초반 3저 기간 동안 국내기업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30대 기업집단의 계열사수는 74년 1백39개에서 86년 2백76개로 늘었다.
대기업규모가 급팽창하면서 경제력집중에 대한 우려와 견제가 대두된 것도
이때다.
87년의 10대그룹 순위는 현대 삼성 럭키(LG) 대우 선경(SK) 쌍용 한화 한진
효성 롯데 등으로 현재와 비슷해졌다.
문제는 87년 이후였다.
높은 임금인상률과 노사갈등 분출로 고비용구조가 고착화됐다.
동남아산 일본제품과의 경쟁이 시작됐다.
국내시장의 개방폭은 넓어졌다.
90년대 중반 메모리 조선 등에서 일본을 추월하는 등 일부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구조적 약점도 심화됐다.
기업들은 성장률이 둔화되고 현금흐름이 악화되는데도 구조조정을 미뤘다.
자동차 전자 건설 화학 등 주력업종에서 대기업간의 경쟁적인 투자가 지속된
가운데 생산성 향상은 정체됐다.
장기간의 성장 지속, 3저와 같은 외생변수에 재미를 들여 위기감을 잃은
것이다.
기업들은 IMF체제를 초래한 원인제공자라는 지적에 할 말을 잃었다.
현재 30대그룹중 13개가 부도를 내거나 협조융자를 받고 있다.
다시 사업기회를 찾아 뛰고 자본을 축적해야하는 50년전으로 돌아갈 위기에
놓인 셈이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