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의 일부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논의가
있다.

작년에는 한글과 한자의 병용이 화제가 돼 한자를 쓰지않는 한맹이 문제가
된바 있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이면서도 자신의대학이름과 전공학과명을
한자로 정확히 쓸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벌써 올해는 별개의 화제로 돼 버리고 작년의 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한글제정에 반대한 최만리의 일이다.

세종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최만리였지만 결국 조선시대의 한글은
최만리가 바랐던 것처럼 널리 이용되지 못했다.

구한말이 되서야 한자와 한글이 병행사용돼 또 한번의 파란이 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궁중과 관청에서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쓰는
정한혼용체가 사용되고 경박한 사람들이 한문폐지론을 떠들고 다닌다"는
내용이 눈에 띄고 있다.

일제시대말기의 한글사용금지책을 거쳐 한글을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시키는
심볼로 자리매김해 오랫동안 한자병용론과 대립해 왔다.

그러나 한글이 민족의 언어로 폭넓게 인식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성주보에서 처음으로 정한혼용체가 사용되고 한글의 가치가 공인받게
된 것은 강위와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박문국을 숙소로 삼고 이미 한성순보가 간행될 때부터
한글의 사용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황현도 정한혼용체를 일본문법을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일평도 사외이문의 속에서 이노우에 가쿠고로에 관해 언급하고있는 것이다.

문제는 한성주보의 한글활자가 도대체 어디서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이지만
한글활자는 자기자신이 시사신보를 간행, 신문의 유효성을 알고있던 후쿠자와
유기치가 일본에서 만들어 제자인 이노우에 가쿠고로에게 건네준 것이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똑같은 후쿠자와 유기치의 문하생인 유길준이 정한혼용체의
서유견문을 일본에서 출판한 사실에서도 알수 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한글을 국민교화의 수단으로 삼고 정한혼용체의 성립에 노력한 것이
일본이라면 그것을 금지한 것도 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국어사에는 이같은 사실이 전해져 오고 있지 않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