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식 <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 국제경영학 yspark@gwu.edu >

지난 30여년간 한국경제의 압축 성장기에 우리나라는 음으로 양으로
일본모델을 많이 모방해 왔다.

일본 대장성의 금융.증권.보험.외환 관리규정들을 우리나라의 옛 재무부
(현 재경부)는 충실하게 따랐다.

우리나라의 다른 경제부처도 내수억제와 정부주도하의 수출중심의 중상주의
산업정책을 일본 경제부처들로부터 확실하게 전수받았다.

한국 최고위의 경제관료를 지냈던 어떤 인사는 우리나라 경제부처들이
마련한 법률과 규정들은 대부분 일본 것을 그대로 가져다 번역했다고 봐도
된다고 고백했다.

한국 정부관리들이 수없는 규제와 간섭으로 철저하게 민간기업들을 지배
통제하는 것도 일본모델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관료직에서 정년 퇴직한 후에는 옛날 자기부처가 관리하고 통제했던
민간기업들이나 조합 단체들의 고위직으로 내려앉는, 이른바 아마쿠다리
(낙하산 인사)의 관례도 일본을 꼭 닮았다.

일본안에는 이러한 아마쿠다리 자리가 약 8만개가 된다는 통계가 나와있다.

우리나라도 중앙부서 소관마다 최소한 1백~2백개씩의 아마쿠다리 자리가
확보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 경제관료는 추측하고 있다.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도 마찬가지로 일본을 모방했다.

전자 제철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방직업 등 우리나라 기간업종들의 대다수가
일본의 기술 자본 경영의 협조를 공식 비공식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을 흉내내
성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비밀이다.

우리나라 재벌형태의 경영도 2차대전 이전의 일본식 재벌에서 그 원조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은 2차대전 직후 맥아더장군이 이끄는 미군정의 훈령으로 재벌이
강제 해체되고 그대신 오늘날의 게이레쓰(계열)로 변신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관료조직과 기업들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지난 30여년간의
경제성장기에 나름대로의 실적을 쌓아올렸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80년대 이후 세계화의 추세가 가속화 돼가고 있는 현실에서도 과연
한국경제가 계속 일본모델을 모방해야 하느냐이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한국경제 성장의 모델이었던 일본경제는 지난 8년동안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이러한 경기침체는 금년들어 더욱 심각해졌다.

일본의 1.4분기 GDP(국내총생산)성장률은 마이너스 5.3%로 급락했다.

5월말 현재 실업률은 4.1%로 50년대 이후 최악을 기록하고 있다.

주가는 89년에 4만엔에 가까웠던 닛케이지수가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겨우
1만6천엔선에서 맴돌고 있다.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작금의 일본경제 형편을 1920년대에 10년이상 지속됐던
"쇼와 경제공황"과 맞먹을 것이라고 내다볼 정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의 일본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금융계의
취약점이다.

작년말에 이미 일본 10대 은행권에 속했던 홋카이도 다쿠쇼쿠은행이 파산
했고 4대 증권회사중의 하나였던 야마이치증권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일본 금융계의 위기는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대장성은 은행들의 전체 불량채권이 6천억달러라고 주장해
왔으나 미국정부와 금융계는 1조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러한 천문학적 숫자인 불량채권은 작년도 일본 GDP의 25%를 넘는 액수이며
이러한 불량채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약 6천억~7천억달러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은행의 불량채권 외에도 일본 보험회사들이 수천억달러의 손실을 장부상에
숨기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과연 일본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이 기회에 촉박한 금융계의 대수술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새로 대장상으로 임명된 전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는 78세의 노령으로 80년대
말 대장상을 지내면서 지금의 일본 불황의 원인이 됐던 "버블경제"를
부추겼던 장본인이다.

그래서 서방 전문가들이 내다보는 그의 성공여부에 대한 전망은 대체로
비관적이다.

한때 전세계 선망의 대상이었던 일본경제가 이처럼 90년대에 들어와 국제
사회의 웃음거리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본 관료조직의 폐해때문이다.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공룡화된 관료조직을 과감히 축소 개혁해야만 우리
경제가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