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과거론을 읽고 있자면 오늘날의 교육적과제와 닮은점이 많아서
놀랄때가 있다.

박제가는 "지금 과거의 목적은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 아니라 점수로
후보자들을 잘라내는데 있다.

다행히 합격한다 하더라도 갈고 닦은 학문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지금의수험공부 그자체를 지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조선시대 초기부터 문제가 돼왔던 과거의 폐해는 마침내 극복할수
없었다.

이같은 역사적사실은 오늘날의 교육문제에 비추어보아도 시사적이다.

사실 국립중앙도서관등에 있는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암기중심의 공부를
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사람과 학문은 오로지 과거만을 위한 것"이라고
일컬어졌던 조선시대의 과거공부와 그리 차이가 없다.

취직과 또다른 시험준비를 위해서일까.

불경기인 근년에는 그같은 경향이 특히 심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같은 현상은 학생들만의 책임이라고 할수 없다.

사회가 그러한 것을 요구하고 대학의 교육환경도 점수중시이기 때문이다.

그같은 일은 학비면제및 장학금을 주고 어렵사리 우수한 학생을 뽑아놓고도
특별히 뽑은 학생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현실에도 나타나 있다.

우수한 학생도 그에 맞는 교육이 없으면 졸업때는 보통학생이 되어 버리는
것이 현상이다.

오늘날처럼 대학교육의 현장에서 암기중심의 공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본래의 대학사명이 보통의 학생을 보다 훌륭하게 기르는데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기를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배울 것인가가 학생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같은 점에도 한계가 있다.

기업도 점수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모으려 하기 때문에 대학교육에 그러한
것이 반영되고 있어서다.

이래가지고는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학도 기업도 보통의 사람을 뛰어난 인재로 기르는 교육적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수한 사람을 아무리 끌어모아도 모으기만 해놓고 그들을 기르지 않으면
교육이라고 할수 없다.

기업도 대학도 그같은 교육현장을 보고 있으면 우수한 사람을 모으는데는
관심이 있어도 기르는 것은 망각하고 있다.

기르는 것을 잊어버리고 제도와 법의 개혁에만 매달리면 그것에서 생겨나는
교육개혁론도 과거의 과거론과 같아서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을수 없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