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히바카리 .. 정진규 <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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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모국어 세대다.
해방 다음해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일본말을 배우지 않았다.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데 "일본말"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부끄럽지가 않았다.
반공반일 교욱이 전부였다고도 할수 있는 그시절, 이 쓸쓸한 자존심을 필자
또래의 의식 속에 지울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자리했다.
그런데 최근 일본말 한 마디로부터 뜨거운 충격을 받았다.
"히바카리"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역사적이라고 할수 있는 한 도예 전시장에서 만났다.
4백여년에 걸쳐 일본 속에 우리 도예를 꽃피운 심수관가의 도예전.
심수관은 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심당길의
후손이 바로 그 심당길의 작품을 "히바카리"라 부르고 있었다.
별로 화려하지도 않고 섬세하달 것도 없는 한개의 찻잔에 담긴 의미는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히바카리"는 우리말로 "불"이라는 뜻.
흙과 유약은 당시 가지고 갔던 우리 조선의 것이고 불만 일본 것을 썼다는
하나의 외침이다.
필자는 이 말이 처음엔 "불만"인줄 알았다.
그러나 불이라는 명사에 보조조사 "만"이 붙어 명사처럼 쓰여지고 있는
이 말의 단호함과 문화적 자존, 비극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의지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선대가 가져가지 못했던 조선의 "불"을 전북 남원에서
재화, 10월 가고시마 사쓰마 도자기 4백년 기념제에 옮겨간다니 이 상징적인
의식 또한 뜻깊다.
물론 문화적 자존과 쇼비니즘엔 큰 거리가 있다.
그러나 "히바카리"라는 말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경제 압박속에 이것 저것
눈치봐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형편에서 우리것, 우리의 본질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문화적 자존을 않으면 정말 모든것을 잃게 된다.
"히바카리"!
몇번을 되뇌어 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9일자 ).
해방 다음해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일본말을 배우지 않았다.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데 "일본말"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부끄럽지가 않았다.
반공반일 교욱이 전부였다고도 할수 있는 그시절, 이 쓸쓸한 자존심을 필자
또래의 의식 속에 지울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자리했다.
그런데 최근 일본말 한 마디로부터 뜨거운 충격을 받았다.
"히바카리"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역사적이라고 할수 있는 한 도예 전시장에서 만났다.
4백여년에 걸쳐 일본 속에 우리 도예를 꽃피운 심수관가의 도예전.
심수관은 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심당길의
후손이 바로 그 심당길의 작품을 "히바카리"라 부르고 있었다.
별로 화려하지도 않고 섬세하달 것도 없는 한개의 찻잔에 담긴 의미는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히바카리"는 우리말로 "불"이라는 뜻.
흙과 유약은 당시 가지고 갔던 우리 조선의 것이고 불만 일본 것을 썼다는
하나의 외침이다.
필자는 이 말이 처음엔 "불만"인줄 알았다.
그러나 불이라는 명사에 보조조사 "만"이 붙어 명사처럼 쓰여지고 있는
이 말의 단호함과 문화적 자존, 비극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의지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선대가 가져가지 못했던 조선의 "불"을 전북 남원에서
재화, 10월 가고시마 사쓰마 도자기 4백년 기념제에 옮겨간다니 이 상징적인
의식 또한 뜻깊다.
물론 문화적 자존과 쇼비니즘엔 큰 거리가 있다.
그러나 "히바카리"라는 말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경제 압박속에 이것 저것
눈치봐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형편에서 우리것, 우리의 본질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문화적 자존을 않으면 정말 모든것을 잃게 된다.
"히바카리"!
몇번을 되뇌어 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