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주현 기자 현지를 가다 ]

피 냄새를 맡은 상어떼는 지금 싱가포르와 대만, 홍콩의 해역으로 몰려들고
있다.

시간은 점차 포식자들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고 있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외환대란은 이들 3개국을 비켜간 듯 보였다.

통화가치 하락 폭도 크지 않았고 주가도 상대적으로 덜 떨어졌다.

그래서 서방언론과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들을 "아시아의 우등생"으로 추켜
세웠었다.

금융산업 발달과 행정의 투명성(싱가포르),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구조
(대만), 충분한 외환보유고(홍콩)가 이들의 굳건한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다는 징조가 도처에서 나타나는 중이다.

성장률은 곤두박질치고 실업율은 치솟고 있다.

엔화불안 속에 외환시장도 다시 흔들리고 있다.

불길한 징조는 "아시아의 관문"이라는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에서부터
느껴졌다.

예전과 달리 웬지 어수선한 분위기.

공항직원은 "지난 5월 중순 폭동사태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연일 쏟아져
들어오는 화교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보면 싱가포르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한집 건넌 옆집이다.

환란이 닥치기 전 인도네시아 부유층들은 싱가포르를 드나들며 고가
사치품과 아파트를 사들였었다.

요즘은 피난민만 쏟아질 뿐 부유층 고객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이 바람에 싱가포르 부동산 가격은 1년 전에 비해 70-80%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환란은 싱가포르 은행들까지 위협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살만 칸은 "싱가포르 은행들의 부실여신 비중이 작년의 3%에서
내년에는 10%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몇번씩 갈아끼운 끝에 최근
2.2%로 다시 내려잡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낙관적"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민간쪽에서는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1.7% 감소해 33년 만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난양기술대학 첸캉 교수)이라는 암을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대만도 속병이 깊어가고 있다.

한 은행분석가는 "대만의 국내부채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1.6%에
달해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부채의 40% 이상이 부동산에 투자돼 있고 부동산 과잉투자는 바로
태국의 버블과 일맥 상통한다는 것이다.

제조업계도 고통받기는 마찬가지다.

소형 콘덴서 제조업체인 카이메이전기의 린쳉밍 부사장은 "한국과 동남아
기업들이 평가절하를 무기로 고객을 다 빼가고 있다"며 "정말 죽을 지경"
이라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 올 1-5월중 수출은 이미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6.9%
감소했고 연간으로는 1.5% 줄어들 것이라고 대만 중화경제연구원은 예측했다.

자딘 플레밍은 "중소기업들의 대량 도산이 예상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무디스사도 뒤질세라 대만은행들의 신용전망을 "유동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다.

이처럼 불길한 신호들이 쏟아지자 정부도 사회간접자본 건설사업 발주를
1년 앞당기는 등 부랴부랴 경기부양에 나서고 있다.

돌아보면 대만이야말로 지난해 뉴타이완달러를 평가절하하며 홍콩과 한국에
환란의 불덩어리를 던져댔었다.

뉴타이완달러의 평가절하가 홍콩 주가의 1차 대폭락(97년 10월23일)을
불러냈고 이것이 연쇄적으로 한국 증시를 강타하면서 환란 도미노를 만들어
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강타한 환란이 동북아로 북상해 올라오는데 대만이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셈이다.

물론 자신이라도 살아보자는 고육책이었다.

이점은 홍콩도 마찬가지였다.

홍콩 당국은 주가폭락이라는 첫 충격이 왔을 때 콜금리를 49%까지 끌어
올리면서 투기세력들을 힘겹게 따돌렸다.

그러나 이바람에 불길은 다른 나라로 확산돼 나갔고 스스로는 경기침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어떻든 몇차례에 걸친 투기세력들의 공격을 용케도 버텨낸 홍콩이지만
최근에는 눈에 띠게 저항력이 떨어지고 있다.

경제성장율은 올들어 1, 2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실업률 주가 부동산가격 등 성한데가 거의 없다.

대출은 위축되고 소비가 얼어붙는 악순환의 조짐이 분명해지고 있다.

경기 한파는 "홍콩의 밤거리" 풍경도 바꿔 놨다.

썰렁해진 침사추이(홍콩의 유흥가), 불 꺼진 쇼윈도...

홍콩의 밤은 이제 더이상 "불야성"이 아니었다.

싱가포르 대만 홍콩-.

이들 3개국은 모두 국가파산 위기라는 극단적 상황은 피해 갔지만 대신
모진 희생을 치르는 중이었다.

더욱이 상어떼는 이들의 체력이 더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fores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