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이, 그 순간순간의 섬광으로, 두 눈을 감기고 두려움까지 지워버리는,
거칠고 열광적이고, 아무것도 바랄 게 없는 허무한 것이라면 말이다.

나는 무엇엔가 부딪쳐 부서지듯이 그를 사랑했다"

전경린(36)씨의 소설은 뜨겁고 강렬하다.

가시를 삼킨 것처럼 아프게 읽힌다.

첫 작품집 "염소를 모는 여자"와 장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도 그렇지만
최근 나온 두번째 소설집 "바닷가 마지막 집"(생각의나무)은 더욱 뜨겁다.

그는 고통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그것과 정면으로 맞선다.

"꽃이 꺾인 해바라기 줄기처럼, 줄곧 비어 있었던, 폐허에 불과한 생"의
아궁이에 고통의 장작을 지피고 그곳에서 "화엄의 꽃"을 피워낸다.

그래서 그는 정념을 풀무질하는 불꽃의 작가로 불린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뜨겁게 달구는 것일까.

"억압 속에서도 사랑이, 고통속에서도 평화가 있게 마련이어서 묶인 것을
풀 때는 늘 이를 악물어야 합니다.

피와 꿈과 순결한 치정의 궤적이 곧 나의 글쓰기입니다"

그는 "거센 바람이 불고 거리는 보자기처럼 휭 날아올랐다가 천천히 내려"
앉는 황량한 풍경속에서 "벌겋게 단 솥뚜껑같은" 습작기를 보냈다.

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기까지 그는 "온 몸에 피를 찍어" 원고지
를 한 칸씩 메운 "적멸의 시간"속에서 스스로를 달궜다.

그곳으로부터 "불붙은 집에 갇힌 사람"같은 열정과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 독한 자기탐구가 시작됐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조금씩 벗어난
곳에 서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

사촌오빠를 좋아한 소녀("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에 관한 이야기"),
운동권 남자와의 아픈 기억("고통"), 결혼한 사람들간의 위태로운 관계
("오후 네시의 정거장") 등 상처와 일탈의 흉터로 얼룩져 있다.

그는 "자정의 검고 허술한 지붕들을 타며 격정적인 소리를 내지르는
발정기의 고양이만큼이나 도발적이고 위험한" 사랑을 통해 존재와 욕망의
경계를 허문다.

그의 시선은 빛의 이쪽과 저쪽이 서로 등을 맞대고 엇갈리거나 아래 위로
포개지기도 하는 삶의 비의성에 오래 머문다.

그 "무경계의 접점"에서 "폭발 직전의 활화산같은 에너지"를 발견하고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작가.

그의 열정은 마침내 불꽃의 정점을 지나 "상생"이미지로 승화된다.

이번 작품집에서 그는 "나를 레일 삼아 무수한 바퀴를 가진 밤기차처럼
어두운 벌판길을 지나가는" 세상의 고통들에 한차례 씻김굿을 베푼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은 바닷가 마지막 집. 빗물에 젖은 미루나무
잎사귀 위로 소라 껍데기를 등에 멘 달팽이 하나 천천히 지나가는 그 시간,
그렇게 작은 한 시절일 뿐"이라고 "가만가만 달래는" 그의 천도가가 슬프도록
아름답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