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캥거루족의 수난 ]]

캠퍼스마다 "캥거루족"이 넘쳐 난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 강풍"은 다 자란 캥거루를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가둬
놓고 있다.

몸집이 커진 캥거루는 좁디 좁은 어미의 배주머니에서 제대로 숨쉬기조차
벅차다.

이제 광활한 초원에서 뛰놀고 싶은 데.

지난 2월.

졸업을 앞둔 S대 사회대생 오모씨(27)는 대학가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던
연극 "강거루군"(극단 차이무)을 보러 갔다.

주인공 강거루는 대학을 졸업한지 4년째.

숱한 입사면접에서 번번이 낙방의 쓴잔을 마신다.

여느 대졸 실업자가 그러하듯 그나마 친구와 후배가 남아있는 학교주변을
맴돈다.

사회는 이런 강거루에게 "캥거루족"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어미의 주머니안에서 머리만 내민채 살아가는 캥거루처럼 학교와 가정의
보호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종속이라는 뜻.

예전엔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기 위한 캥거루가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취업이 안돼 어쩔수 없이 캥거루 생활을 하는 이들이 압도적이다.

"나도 강거루네"

요즘 오씨는 잔뜩 주눅든 강거루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지난해 L그룹 공채시험에 여보란듯 합격했지만 이게 웬걸.

지난 연말 발령 예정이었으나 올3월로 연기되더니 3월이 5월, 또 5월이 7월.

지금은 기약할 수도 없다.

취직과 함께 살집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친구와 후배의 신림동
자취집을 전전해야 하는 신세.

집에서 밥만 축내고 있자니 견딜 수 없어 도서관에 나가보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과외아르바이트마저 뚝 끊겨 생활도 어렵고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해도
마음이 편치 않다.

S대학교 상경대 86학번 김모씨(31)는 학교에 발들여놓기가 망설여진다.

도서관을 찾은 자신의 등뒤로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도서관 입구의 수위 아저씨 눈빛도 예전같지 않다.

김씨는 "낭만형 캥거루족"의 원조다.

오렌지족에도 캘리포니아산이 있듯이 정통호주산 캥거루족이랄까.

고시파를 자처하며 대학졸업후 4년간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다.

사회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직장찾기를 미뤄왔다.

고액과외로 바둑 당구 등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하며 지냈다.

H그룹에서 1년여간 회사생활도 했으나 대학시절의 낭만이 그리워 캠퍼스로
돌아왔다.

곧 "IMF한파"가 닥쳤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캠퍼스는 "IMF형 캥거루들"만으로도 포화상태.

학교는 더 이상 보금자리가 아니다.

진짜 고시파가 된 김씨는 도서관 자리를 차지할 엄두가 안나 학교근처
선배 자취집에 둥우리를 틀었다.

IMF체제는 새로운 "한국형 캥거루족"을 만들어 냈다.

취업빙하기를 견디다 못해 외부와 일체 접촉을 끊어버린 "잠수족".

취직시험에 합격했지만 발령 연기로 인해 하염없이 전화만 기다리는
"대기족".

이들은 아직 소수다.

"한국형 캥거루족"의 주류는 도서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서는 "캠퍼스 출근족".

취업난과 생활고란 이중고로 고통받는 IMF의 또다른 그늘인 셈이다.

하루하루 힘들게 버텨나가고 있는 캥거루족들은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어미 캥거루의 주머니가 터져버릴 것같기 때문이다.

곧 기말시험 시즌이 다가온다.

지난 중간고사 시즌때 한차례 겪은 "재학생들과의 처절한 도서관 자리
쟁탈전"을 또 치뤄야한다.

학교측은 졸업생보다는 재학생 우선이다.

학생회에서는 엄격한 "캥거루 통제"를 요구한다.

더욱 잦아진 재학생들과의 마찰.

웬지 캥거루 눈에는 이들이 "예비 캥거루"로 비친다.

"올 상반기중 취업률은 지난해의 3분의 1 수준인 20%를 밑돌고 있다"
(김농주 연세대 취업정보실 주임)

그만큼 새로운 캥거루들이 몰려온다는 얘기다.

캥거루족은 벼랑끝에 서있다.

< 송태형 기자 toughlb@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