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밑이 전혀 설밑같지 않다.

IMF 한파가 전국을 강타, 설밑경기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설 상여금은 커녕 임금도 못주는 회사가 수천개에 달한다.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 바람은 위축된 샐러리맨들을 더욱 주눅들게 하고
있다.

설대목이면 한목잡았던 시장이나 백화점은 썰렁하기만 하다.

고향에 가려는 사람도 작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세뱃돈으로 줄 1만원짜리 신권을 찾는 사람들은 드문 반면 1천원짜리
수요가 많은 것도 달라진 점이다.

설밑 분위기는 유례가 없을만큼 삭막하기 조차하다.

한마디로 올해 설은 설같지 않은 셈이다.


<>샐러리맨 = 올해 설 연휴의 특징은 돈 못받고 많이 쉬는 것.

작은 즐거움을 주던 설 상여금은 온데간데 없다.

연말보너스나 월급마저 끊어진 업체가 1천8백58개사나 된다.

이런 판이니 떡값 등 설날 가욋돈은 꿈도 못꾼다.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1백명이상 사업장에서조차 설날 특별 상여금을
주겠다는 곳이 반도 안된다.

여기다 각 회사들은 더 놀라고 휴일을 늘리고 있다.

이번 설날 연휴의 평균 휴무일은 4.3일.

작년 3.7일보다 크게 늘었다.

샌드위치 데이인 26일을 같이 쉬도록 한 것은 임금지출을 줄이기 위한 것.

구조조정이니 정리해고니 해서 하루하루가 불안한 마당이다.

그래서 더 쉬라는 말에 뜨끔해진다.

"즐겁긴 커녕 오히려 불안하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귀성문화 = 설에 고향을 가겠다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귀성인구는 3백5만명으로 37만명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서울시청)

자가용을 타는 대신 기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하겠다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기차는 새마을호보다 무궁화나 통일호가 더 인기다.

또 달라진 점은 고향에 가족중 한 사람만 슬쩍 갖다오겠다는 경우가
많다는 것.

"기차표 예매자중 한 장만을 산 사람이 작년보다 엄청나게 늘었다"는
철도청 관계자의 말이 이를 반증한다.

부산에 계시는 부모님을 혼자 찾아뵙기로 한 이성철씨(41)는 "회사가
부도가 난 마당에 가족이 모두 함께 가면 비용도 많이 들고 어른들께서
하시는 걱정소리에 아이들도 위축될 것 같아 식구들은 서울에 놔두기로
했다"고 씁쓸해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하러 가는 아이들을 올해는 보기 힘들게 됐다.

부모나 어른에게 돌리던 설 선물도 올해는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한솔PCS가 최근 성인 4백5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두명중 한명꼴로
선물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선물을 하더라도 대부분 작년보다 줄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장 = 샐러리맨들의 어깨가 이처럼 움츠러들자 시장과 백화점에선
한숨소리가 커졌다.

사실 상인들에게 세밑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물건을 많이 팔기 때문만은 아니다.

파는 사람도 기분좋고 사는 사람도 정겨운 그런 때다.

설날 대목이라는 말엔 이런 정서가 배어 있다.

그러나 올해는 대목이 없다.

남대문시장에서 건어물을 파는 정형수씨(55)는 "장사를 30년 넘게 하고
있지만 이런 설날은 처음"이라며 "장사가 안돼 권리금도 없어진 마당에
설날까지 이 모양이니 살 맛이 안난다"고 말했다.

남대문시장에서 속옷 판매점을 운영하는 김만현(43)씨는 "세밑이면 3백
세트이상 나가던 선물상품이 하나도 안팔리니 어떻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여행 = 설날이면 흥청망청하던 거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외국으로 나가는 발길도 완연히 줄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 따르면 올 설연휴에 사이판 괌 등 관광노선
예약률이 50%대로 주저앉았다.

작년만해도 90%를 웃돌았다.

제주도나 경주 설악산 등 유명 호텔이나 콘도도 울상이다.

설이 코앞에 닥쳤지만 예약하는 사람이 없다.

매년 예약초과로 골치를 앓던 것과는 정반대다.

하지만 이같은 현상 역시 국민들의 의식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IMF에
의해 강요된 것임에 분명하다.

서울 연희동에 사는 정순희씨(34)는 "경제주권을 상실하고 설날마저
설날답게 보내지 못하는 우리네 현실이 안타깝"며 "온 국민이 힘을 합쳐
하루빨리 경제를 재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주현.김재창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