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지니 곧 돈의 이식 식물의
이식, 무릇 이식을 낼만한 것의 이식을 취하지 말것이라"

구약성경 신명기 23장19절의 "말씀"이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이식, 곧 금리는 오랜 기간동안 특히
죄악시됐다.

"돈이 돈을 낳지않는다"는 이른바 화폐불임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랜기간 서구 철학자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중세의 스콜라학자들은 집이나 말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 것은 그
물건을 사용해 얻을 수 있었던 쾌락을 희생했다는 점에서 당연하지만,
돈을 빌려준 것은 어떤 희생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이자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펴기도 했다.

금리가 신학적으로도 면죄부를 받게된 것은 종교개혁이후 칼빈에 의해서다.

금리에 얽힌 이같은 학설과 기록을 오늘의 눈으로 보면 몇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세의 인솔로 이집트를 탈출했으나 아직 가나안땅에 자리잡지도 못했던
유대인들의 광야시절에도 이미 금리가 문제가 됐다는 점, 그렇게 오래고
자연발생적인 존재인데도 그처럼 오랜기간 죄악시돼오고 미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끈다.

오늘을 사는 사람중에 금리를 죄악시하는 사람은 물론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가 자본이고 그 가격이 금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그 가격이 터무니없으면 거부반응을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은행분석에 따르면 96년 우리나라 제조업체 매출액중 금융비용은
5.8%, 당기순이익은 0.53%이다.

최근들어 금리가 거의 2배로 올랐으므로 금융비용이 같은 비율로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면 현재의 고금리 아래서 살아남을 기업이 없다는 얘기가
성립한다.

오늘부터 뉴욕에서 시작되는 국제채권은행단과의 협상도 본질은 금리다.

기간이 연장된들 리보(런던은행간금리.현재 5.65%선)에 6~10%를
얹어준다면 우리 경제가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은 자명하다.

가산금리 0.5%이내이던 차입조건이 5%를 얹어줘도 빌리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된 까닭을 모두 생각해야할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