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연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국제통화기금(IMF) 한파가 온 나라를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

국가부도라는 위급상황은 일단 넘긴것 같아 보이지만, 외환위기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당장 갚아야 할 단기외채가 많은 데다 해외 금융관계자들의 우리 경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IMF의 관리를 받게 되자 일부에서는 제2의 경술국치라고
비분강개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재도약을 위한 구조조정 기회로 활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은 정부 기업 근로자 등 모든 경제주체가 처음의 충격과
당황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수 있을까 대응책
강구에 골몰하고 있다.

최근 우리는 신용과 믿음 기강 권위 등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있어 국가장래가 우려된다.

이들이 제기능을 못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무너졌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들어 다리가 부서지면 쉽게 건설할수 있지만 신용이나 기강 등이
무너지면 다시 복원하기가 매우 어렵다.

지금 우리 경제는 신용붕괴 현상을 보이고 있다.

외국의 우리 경제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금융기관은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가 깨지면서 금융기관의 "나 먼저 살기"로 인해 금융기관간은
물론 금융기관과 기업간의 신용관계도 무너지고 있다.

외환위기를 헤쳐나갈 주역인 기업들이 수출을 하고서도 수출환어음을
할인받지 못해 도산하는가 하면, 원자재를 수입하지 못해 수출품생산을
중단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권위의 붕괴도 오늘의 경제위기를
가져온 원인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정부의 권위를 비롯하여 기업경영자와 가장, 그리고 전문가의 권위까지도
크게 위축되어 국가와 사회를 선도할 구심점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첫째 기본과 원리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기본과 원리를 무시하면 기초가 튼튼치 못하게 되고, 외부로부터도 불신을
받게 된다.

국제 금융계에서는 우리나라의 통계, 은행의 부실규모, 기업의 재무제표
등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 기본과 원리에 충실하기 보다는 임기응변과
편법에 능해야만 성공할수 있다는 풍조가 만연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 모두 기본과 원리에 충실하여 민족 전래의 정직성을 회복해야만,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을수 있을 것이다.

둘째 수출기업을 포함한 건실한 기업들을 살려야 한다.

기업들은 무한경쟁시대의 주역이며,현재의 난국도 기업들이 앞장서
타파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기업들은 경제부실화에 대한 책임문제로 심한 비난을 받고
있고, 금융권의 무조건적인 자금회수로 매일 수백개씩 쓰러지고 있다.

기업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한 기업은 책임져야 하고, 일부 대기업의 무리한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경영방식은 개선되어야 하며, 구조조정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일괄적으로 모든 기업을 비난하고 자금을 회수하면 유망수출기업
및 중견기업, 기술력있는 벤처기업을 포함한 건실한 기업까지도 도산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리경제의 생산및 수출기반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경제는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어 시장경제원리 만으로는
정상화시킬수 없는 실정이다.

정부와 금융권의 적절한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셋째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를 재음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반쪽의 세계화를 지향해 왔지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기업들의 해외진출을 세계화로 여겼고, 마치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 세계화되는 것으로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온 것같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외국기업의 국내진출을 경계하고, 외세에 의한
우리경제의 식민지화를 우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외국인의 눈에 한국은 외국인을 싫어하고 배척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세계화는 다른 나라와 어울려 사는데 익숙해지는 것이라 할수 있다.

외국것을 무조건 좋다고 하는 사대주의가 세계화가 아닌 것처럼, 외국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것도 세계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외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하고 싶다면 외국기업도 국내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할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국가에는 흥망성쇠가 있게 마련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도 80년대에는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파탄,
그리고 유수 은행도 부도직전까지 몰리는 굴욕을 맛보았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쇠락하는 경제의 대명사로 영국병이라는 말까지 유행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고통을 감내하며 구조조정에 성공하여
오늘날의 일류경제를 이룩했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