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부터 19년까지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의해 야기된 독감이 전세계에 퍼져 2천여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국 육군 주둔지였던 캔자스주 포트하일리에서 발생된 이 독감은 유럽
파견군 수송선을 매개로 유럽에 퍼진 뒤 전세계를 강타했던 것이다.

그 진원지였던 미국에서는 55만명이 희생됐다.

유럽 전선에서 전사한 숫자의 거의 10배나 되는 것이었다.

당시 워싱턴에서 응급병원을 개설했던 한 내과의사가 "환자들에게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의사들을 문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 뿐이었
다"고 회상했을 정도로 환자들이 넘쳐났다.

많은 도시들이 독감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엄격한 통제수단을 동원했다.

극장 학교 술집 교회 등을 폐쇄했는가 하면 공공장소에서 침을 뱉고
손수건없이 기침을 하거나 콧물을 흘리면 징역형 또는 벌금형에 처해졌다.

그밖의 나라들에서도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인도인 5백만명, 러시아인 45만명, 이탈리아인 37만7천명, 대영제국인
23만2천명, 캐나다인 4만4천명이 죽었다.

극지방의 에스키모 마을과 중앙아프리카의 정착민촌 등이 아주 사라져
버렸고 괌주민의 4.5%, 타이티인의 10%, 서사모아인의 20%가 병사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 재난의 정체를 몰랐었다.

1933년에야 인체에서 병원균인 바이러스를 분리해 냄으로써 그 원인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병원균에는 A형(뒷날 A0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뒤로도 변종 독감바이러스가 생겨났다.

40년에는 B형, 47년에는 A1형, 49년에는 C형, 57년에는 A2형이 발견되었다.

그때마다 독감예방용 백신이나 치료용 화학요법제(해열진통제 항히스타민제
지해제 등)가 개발되어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어 왔으나 그 완치방법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더욱이 신종 바이러스에는 속수무책인 상태다.

이번에는 홍콩에서 닭 오리 새등 조류에서 옮겨진 신종 H5N1바이러스에
의한 치명적 독감이 발생해 1918년의 악몽을 재현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보건당국은 이 신종 독감 예방책을 서둘러 세워야 할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