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란 예술 현상이나 대상의 특성을 한데 묶어 설정한 보통명사이다.

이것의 명목은 수용적 이해를 돕는 인위적 장치로 분명히 가치면에서
동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을 마치 가치 결정의 척도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장르를 위계 개념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부터이다.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장르가 있었다.

이를 테면 공간양식에 의한 것으로 회화 조각 등이 있으며 재료에 따라
석조 목조, 혹은 유화 수채화 등이 우리의 상식에 자리 잡고 있다.

동서양과 같이 지역을 따지는 경우도 있으며 좌상 혹은 입상 등 대상의
포즈에 따른 경우, 현대에 와서는 구상 혹은 비구상과 같이 표현양식에 따른
경우도 있다.

그런데 계몽주의 예술론 연구가들은 그것의 목적론에 대입시켜 순수미술
(파인아트)과 응용미술이라는 장르개념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개념들이 거대한 가치 규정에 있어 선험적인 요소로
가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야기되는 문화예술의 편견들이 양산되기 시작하여 문화
발전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종이에 그려진 수성안료 그림은 캔버스 유화보다 열등하다거나,
혹은 드로잉과 같은 선묘는 페인팅을 위한 습작일 뿐이라거나 하는 등의
편견이 의외로 뿌리 깊다.

그러나 편견을 뒤집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의 전설적 화가로 통하는 앤드루 와이어드는 과슈 등의 수성안료를
주로 쓰는 수채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삽화같이 가볍고 경쾌한 채색을 쓰면서도 밀도있는 서정성과
회화적 완성도를 과시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70년대말부터 구상회화나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가들
치고 그의 그림에 영향 받지 않은 작가들이 없을 정도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피카소 같은 경우도 워낙 유명한 걸작들에 가려 있지만, 드로잉이나
도자기 등이 없었더라면 그의 예술은 얼마나 단조로웠을까 싶을 정도로
비중을 갖는다.

장르에 대한 편견은 소위 응용미술에 대해 유난히 강하게 드러난다.

도자기 텍스타일 가구 장신구 등의 공예와 일러스트 애니메이션 그래픽
등이 순수하지 않다는 이유로 고유의 미적 가치를 외면하곤 한다.

금세기 후반 들어서는 각 분야의 조형이 기존 장르 영역을 벗어나 다양하고
폭넓은 조형적 활동이 치열하고 참신하다.

그러나 우리 미술시장에서는 그러한 새로운 실험과 시도에 대해 거의
외면한 채 기존 회화 조각 등에만 열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금세기 초 바우하우스가 현대 미술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각 장르간의 독립성과 유기적 통합성이 교육과 창작 모두에 보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미술이 국제무대에서 지속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모든 장르들이
고루 성장해야 한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참신성 고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도 바로 미답의 땅을 개척하는 일이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장르의 현장을 편견없이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자.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지를 새삼 확인하게
될 것이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