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1900년 10월 19세때 프랑스 파리로 갔다.

당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데 지쳐버린 프랑스 화단에 들어선
것이다.

화가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더이상 확신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피카소가 등장할 시기가 성숙됐다.

그는 스페인회화뿐 아니라 스페인의 큐비즘까지 데리고 파리에 입성한
셈이다.

19세기의 프랑스회화는 모두 프랑스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20세기에도 프랑스에서 회화는 만들어졌지만 스페인인에 의해서 였다.

20세기의 최고 거장 피카소가 한 시대의 흐름을 장악한 것이다.

피카소는 어려서부터 다른 학생들이 글자를 그리듯 그림을 썼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데생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태어날때부터 그릴줄 알았으며 그의 데생은 어린이들의
유치한 수준이 아니라 화가수준의 데생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물이 아닌 표현된 사물을 그렸다고 평론가 거트루드
스타인은 평하고 있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그림은 결국 그의 언어였으며 그것도 수다쟁이였다.

그의 작품이 하도 다양하고 창조적이어서 그를 최고의 예술적 카멜레온
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회화에 있어서 20세기의 리얼리티는 절대로 19세기의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피카소가 이를 가장 잘 감지한 유일한 화가였다.

마티스와 다른 화가들도 20세기의 눈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리얼리티는
19세기의 것이었다는 점이 피카소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피카소는 "예술의 힘은 우리가 터부시하는 것들을 파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일생은 표현을 위한 격렬한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싸움은 그에게 있어서나 이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에게도 무서운
것이었으며 이 표현의 투쟁은 죽기전까지도 계속되었다.

마침 한국경제신문사는 피카소가 말년에 그린 그의 미공개작품 1백6점을
신사옥에서 전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또하나의 터부를 깨뜨린 에로티시즘 작품까지 포함되어 있다.

20세기 시대정신을 볼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