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한보와 기아사태는 물론 금융기관의 부실경영이 촉발하게 될지도
모를 금융위기의 수습에 속수무책이 되자 이를 호도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제도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시장원리를 내세우면서 경제난국이 순리적으로
타개될 것을 역설하고 기대하고 있다.

반면 반시장론자들의 비판의 소리는 요즘 언론을 통해 그 어느때보다 더욱
거칠어지고 있으며 비시장경제적인 자구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강도 높은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경제문제 해결에 비시장경제적인 케인스의
거시전략수단이 쓰여지고 있지만 사회경제적으로 득보다는 실이 더 누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다.

그러나 불경기의 와중에서 금융위기가 초래하게 될지도 모를 기업도산의
도미노효과를 우려한 정부는 비시장경제적인 자구책으로 전금융기관에 대해서
한은특융과 아울러 대외채무를 정부신용으로 지불보증해 주는 통화팽창조치를
과감히 결정하였다.

특히 정부지불보증의 역할을 정책적 이해득실면에서 살펴보면, 지불보증의
실은 한은특융처럼 정부의 자유재량권에 의해서 통화가 남발되는 금융현상과
다름이 없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는 사회불안과 삶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물가상승의 비도덕적
횡포와 경기부침의 반복적 악순환을 유발하게 되고 스태그플레이션의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반면에 지불보증에 의한 통화팽창이 장기적인 연구개발투자에 긴밀히
연계되어 기술혁신을 유도하게 될 경우 기술혁신이 구현된 상품차별화를
바탕으로 하는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되고 규모경제의 이점을 활성화하여
성장촉진 물가안정 국제경쟁력의 제고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
지불보증의 득이다.

그러므로 정부지불보증의 필요조건은 기술혁신이다.

60년대 초기에 제3공화국이 야심에 찬 수출주도형 계획경제체제를
설정하고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을 수립하던 그 시점에서 오늘의 경제문제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30여년간에 걸친 오랜 잠복기 끝에 필연적으로 싹트게
된 것이다.

결코 우발적이 아니다.

그 이유는 허다한 우여곡절을 거쳐 정부가 교체되는 와중에서도
제3공화국의 경제정책의 청사진만은 성전처럼 대물려 왔으며 고도성장의
심각한 후유증이 예측되고서도 성장에 제동을 거는 처방만은 금기시되어
왔기때문이다.

현시점에서 한은특융과 정부지불보증은 땜질식의 단기적 처방일 뿐이다.

경제의 장기적 구제처방은 금융정책을 시녀로 전락시킨 재정정책의 우위와
성장지상주의가 주축이 된 현계획경제체제를 과감히 수정하여 적정경제
성장률에 의한 성장촉진과 정치성이 배제된 한은의 독립적 금융정책에 의한
안정추구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준시장경제체제로 시급히 전환하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고전적 완전고용 경제모델의 저변에 흐르는
경제사상에 따르면, 가계는 일하여 벌어들인 소득을 소비와 저축에 각각
어떤 비율로 할당할 것인지에 대한 경제적 선택을 자유로이 결정하게 된다.

만일 생산자가 가계의 비율선택을 생산지침으로 자유로이 채택하여 가계가
제공하는 노동량으로 가계가 원하는 소비상품과 양을 생산하게 될 경우
생산부족에 기인한 인플레이션 또는 과잉생산에 기인한 불경기의
유발가능성은 제거되고 물가수준의 안정과 완전고용이 달성된다.

그러므로 가계의 일과 소비에 대한 비율선택이 충분히 감안된 각 생산자의
생산지침에서 추론되는 개인적 기업성장률의 총합이 바로 적정경제성장률이
되는 것이다.

만일 정부가 적정경제성장률을 무시하고 전단적으로 경제성장률을
상향조정하여 경제적 도약을 주도하게 될 경우 상품생산량은 증가하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성장률의 누적효과(복리계산방법의 이자율이 누적효과와
대등)에 의하여 가계의 소득과 소비가 누적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국민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게 된다.

그러나 비민주적인 전단적 결정의 기회비용은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물질만능주의, 배금사상, 사회적 비리와 부패, 인명경시풍조, 환경훼손과
오염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기회비용을 절감하고 경제성장률의 적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장률의
하향조정이 불가피하다.

오늘날 제3공화국의 유산인 성장지상주의는 경제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또한 한은특융과 정부지불보증의 결정은 경제를 스태그플레이션의
수렁속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게 할지도 모른다.

73년도 후반에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아랍산유국들이 원유의 대량감산과
대미 금수를 단행하면서 촉발시킨 석유위기 때문에 미국경제는 스태그플레이
션에 시달려야 했다.

이를 계기로 케인스 경제학이 제시하는 처방이 스태그플레이션 증상을
치유하기에는 너무도 무력하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케인스주의의 쇠퇴를 입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런데 케인스경제학의 뿌리와 줄기는 한마디로 고전경제학이다.

때문에 정부는 월등한 단기적 효과를 산출하는 케인스의 거시전략수단만을
집요하게 고집하기 보다는 고전적 지혜와 이상에 귀를 기울여 케인스적
난국타개책을 가계의 경제적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반영하는 적정경제
성장률과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는 한은독립으로 보완하면서 시장경제체제로의
점진적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장기적 안목으로 볼때 현명한 자구책이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