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건축거장 안토니 가우디.

그는 1852년 지중해 연안의 스페인 까탈루냐 지방에서 구리세 공인의
아들로 태어나 시류를 거부한 건축가로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숨을 거둔 순간까지 신에 대한 봉사와
사랑을 실천했다.

17세때 건축학을 공부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 8년만에
졸업했다.

졸업당시에는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사용했으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내는 등 독창성을 발휘했다.

가우디는 1926년 6월 필생의 대작으로 삼은 성가족교회의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전차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던 그는 남루한 행색때문에 사고직후 행려병자로
오인돼 빈민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이 들고난 후에도 국가에서 제공한
왕실병원을 거부한 채 "빈민들과 함께 생을 마치겠다"며 병원을 옮기지
않았다.

1883년부터 성가족교회를 짓기 시작한 그는 다른 모든 일을 중단한 채
성당건설에만 매달렸다.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그는 조그만 집에 나무침대 하나만을 놓고 살았다.

이 침대가 그의 유일한 재산이다.

그는 특히 임종 직전에 자신의 이름을 상업적 목적에 이용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가우디란 상호등록을 받지 않고 있다.

그는 평생을 건축에만 전념했을 뿐 논문을 쓰거나 강의하는 것을 피했다.

그의 출판물은 1881년 라 르네센사라는 잡지에 실린 단 한편의 논문
뿐이다.

<부산=김태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