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국 < 국립국악원 예술감독 >

해방후 5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국력은 실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마치 경제적 문화적 결실이 풍성했던 조선조 세종때의 전성시대를 누리는
것만 같다.

국립국악원도 이러한 국력의 성장에 힘입어 많은 변화를 겪었다.

6.25전쟁의 와중에 국악사 16명으로 부산에서 개원했을 당시의 국립국악원
은 그 규모에서도 미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 세종때 국립음악기관인
장악서가 1천7백50명의 연주인들을 가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 사회적으로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국립국악원은 1984년 서초동 우면산 기슭에 전문 국악공연장 건립을 시작
하면서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로써 오늘날에는 위치나
시설면에서 명실공히 "나라의 음악"을 관장하는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외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도 현재의 국립국악원은 나라음악
의 본가로서의 역할을 공연 교육 연구 창작 등 국악의 모든 분야에서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렇게 국립국악원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성장.변화해 온 것과 함께
국립국악원 악원으로서 나의 인생도 성장.변화해 왔다.

국악에 입문하게 된 것이 1956년 국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학하면서
부터니까 벌써 40년이 넘었다.

국악사양성소에 입학하던 해가 14세때니 국악원에서 나의 청.장년 시절을
모두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청년도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14세의 나이에 나는 무척 숙성
했던 것 같다.

선생님앞에서는 감히 말 한마디, 시선 한번 주는 것조차 어렵고
조심스러웠지만 선생님의 입에서 악기를 통해 소리가 흘러나올때면 나는
넋을 잃고 선생님의 연주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가 부는 모습인양
황홀해 했다.

밤에는 달빛을 타고 방으로 스며들어오는 가락에 홀려 새벽까지 그 가락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 당시 나의 국악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짝사랑이 그렇듯이 열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짝사랑은 평생 잊혀지지 않듯 그래서 국악을 내 평생의 업으로 보듬고
살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조건 없는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국립국악원이라는 무대.

그래서 나에게 국립국악원은 단순히 밥벌이를 위한 직장이 아니며, 더욱이
내인생중 40년이라는 기간이 국립국악원 40년의 역사와 함께 한 것임을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즈음에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국악 그리고 국립국악원이 양적으로 팽창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민의 음악, 국민의 기관으로 자리잡는
것이다.

물론 하루가 다르게 국악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고 그만큼 국립국악원을
찾는 사람의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얼마전 공연된 "청소년을 위한 특별연주회"는 연주회 기간 5일내내 예악당
8백석의 좌석표가 모두 매진이 되고 입석표마저도 없어서 못들어 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정도의 관심이라면 국악이 진정한 국민의 음악으로 자리잡을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국립국악원은 국악원의 직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국가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국립국악원의 실질적인 직원은 국민들이다.

국민들이 국립국악원의 모든 사업과 공연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때
국립국악원이 국민의 음악기관으로서의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

8월의 절반도 지난 오늘, 나는 국립국악원의 넓은 광장 한가운데에서 햇빛을
받으며 서 있다.

요즈음은 방학을 맞은 학생들로 광장이 조용할 날이 없어 시끌벅적하다.

엄마의 손을 이끌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떼지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14세적에 가졌던 국악에 대한 열병을 느낄수는 없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본다.

40년동안 국립국악원과 삶을 함께 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들과 함께 이
넓은 광장을 가득 채울 사랑을 만들어 나가리라 생각하며...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