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아직도 한반도 침략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후세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까지 일제의 만행을 잊어버린 것같아
안타까워요.

일본인들이 틈만 나면 망언을 일삼는 것도 과거 "식민지 조선"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는 미련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에 태어나 식민지와 전쟁 등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하리마오박(78.한국이름 박승억)씨가 광복 52주년을 맞는 감회는
남다르다.

5살때 부모가 독립자금을 제공하다 일제에 발각돼 모진 고문을 못이겨
자살하자 고아가 된 그는 자식없는 일본인 판사 부부의 눈에 띄어 적자로
입양됐다.

부모를 죽음으로 내몬 나라의 상류층 아들로 다시 태어난 그의 운명은
일본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면서 더욱 기구해졌다.

그가 8.15에 맞춰 펴낸 장편실화소설 "누가 무궁화 꽃이 피었다고 말하는가"
(전2권 송림출판)에는 한 인간을 밟고 지나간 역사의 수레바퀴자국이 짙게
패어있다.

"중학 3학년때 도쿄 히비야 공원에 놀러갔다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만났죠.

그중 한사람이 내게 한글과 역사를 가르쳐주며 한국혼을 일깨워줬어요.

"나는 누구인가" 하는 갈등에 빠져 법관이 되라는 양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망망대해를 떠돌고 싶어 도쿄상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이 무렵 박씨는 일본 육군 중장의 외동딸 시즈코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사랑은 좌절되고 이를 비관한 시즈코는
끝내 자살하고 만다.

학교를 마친 그는 40년 1월 일본 육군선박공병부대 소위로 임관된다.

이듬해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그는 대만과 필리핀에 파견된뒤 "반전개혁"을
도모하자는 5X비밀결사단의 밀서를 받는다.

그는 이에 연루돼 결국 반국가단체조직 혐의로 헌병대에 체포돼 하루에도
두세번씩 생사를 넘나드는 고문을 당한다.

"고문으로 체중이 39kg까지 줄었지요.

알고보니 육군성 발신 괴편지는 나를 군사재판에 넘겨 사형시키려는
함정이었어요" 범인은 어이없게도 시즈코의 이종사촌인 육군장교였다.

시즈코를 사랑했던 그는 박씨 때문에 그녀가 자살한데 앙심을 품고 비밀
편지로 함정을 판뒤 "조선인 신분을 숨긴채 반란을 꾀하는 불온세력"이라는
투서를 보내 체포토록 공작한 것.

결국 박씨는 5년형을 언도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 해방되던 해 9월에
석방됐다.

그는 마닐라에서 목격한 종군위안부들의 참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14~17세 조선처녀들이 하루에 60여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까무러치곤
했어요.

한 조선인 하사가 그의 여동생과 마주쳤다가 미친듯이 뛰쳐나간뒤 여동생이
혀를 깨물고 죽은 사연도 있었습니다"

해방후 잠시 한국으로 왔다가 일본에서 만났던 미국정보기관 요원의 소개로
도미, 극동지역 담당으로 일하다 80년 은퇴한 그는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알고
일본인의 심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에 과거 그들의 만행을 통해 오늘의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싶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