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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의열전] (31) 취금헌 박팽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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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박씨의 시조는 후백제왕 견훤의 사위로 견훤이 고려에 투항한 뒤에
    견훤과 내통하여 신검을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우고 고려에 귀순
    하여 좌승의 벼슬에 올랐었던 박영규라고 하나 그 후대 계맥이 불분명하여
    실제로는 박팽년(1417~56)의 고조부인 고려 보문각 대제학 박숙정을 증시조
    로 삼는다.

    그는 당대의 거유인 익재 이제현(1287~1367)과 근재 안축(1287~1348)과
    같은 대성리학자의 지우를 받을 만한 선구적인 성리학자로 충숙왕 13년
    (1326)에는 국자제주를 지냈고, 관동 존무사(관찰사)로 나가서는 고성
    삼일호에 사선정을 짓고 강릉 경포대에 경호정을 지으며 울진에는 취운루를
    짓는 풍류를 자랑하는데 이런 누정에 이익재와 안근재로 하여금 창건기를
    짓도록 하여 그 창건 전말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 박숙정의 다섯 자제중 막내인 공조참판 박원상이 박팽년의 증조부인데
    이때부터 공주 유성에 자리를 잡아 살았던 듯 그 묘소가 유성 동쪽 대별리
    둔이동에 있다고 정조 9년(1785)에 간행한 "순천박씨족보"에 기록해 놓고
    있다.

    뒷날 이 고장 출신의 거유들인 우암 송시열(1607~89)과 동춘 송준길(1606~
    72)이 박팽년의 증조부인 까닭에 그 묘소 앞에 묘비를 짓고 써서 새겨 세워
    놓는다.

    박원상은 다시 수생 장생 안생 역생의 네 아들을 두는데 그중 셋째인 안생
    이 박팽년의 조부이다.

    박안생은 조선왕조에서 의영고사와 목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박팽년의 부친인 둘째자제 한석당 박중림(1400~56)이 이조판서
    에 오르게 되자 그 부친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는 영예를 얻는다.

    그런데 박안생은 전의의 명족인 선 안동 김씨(김방경의 후예는 선안동이라
    하여 조선후기에 세도하던 김상헌 후손인 후안동과 혈통이 다른데 이곳
    안동 김씨는 선안동에 해당한다) 한성좌윤 학당 김휴의 둘째따님에게 장가
    들어 처가 근처로 이사하니 그가 살던 전의읍치 북쪽의 상.중.하대부리
    일대를 박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현재의 전의면 관정리 일대이다.

    상대부리는 전의읍치에서 7리, 하대부리는 5리 떨어진 곳이다.

    "전의읍지"에 의하면 집 부근에 한석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있었다
    한다.

    따라서 박중림은 외가가 있는 학당리에서 탄생하여 박동에서 성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박동은 금북정맥(차령산맥)이 천안 태조산으로부터 목천 경엄산을 거쳐
    고려산으로 내려와 태호고개 능고개 탑고개로 이어지면서 서남쪽으로 계곡을
    만들어 놓은 협곡에 위치해 있으니 김종서가 태어나 자라난 요골 비계실모양
    앞이 길게 터진 산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박중림은 이곳을 그 맏형 박맹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전의 남쪽
    쇳골(김곡:전동면 송성리 중송동)로 이사하여 그 부근에 부모 산소자리를
    마련하였던 듯하다.

    세종 28년(1446) 12월 18일에 당시 30세의 집현전 교리(정5품)였던 박팽년
    이 그 부친인 좌승지(정3품 당상관) 박중림의 옥사가 억울하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아비가 갑자년(세종 26년:1444)에 부친상을 당하여 전의현 남촌에서
    시묘를 살았는데 그 해 여름에 목천의 접노 김삼이 그 아들 김산을 데리고
    전의 본가에 이르러 그 아들을 놓아두고 신의 아비를 여막에서 보고 나서
    그대로 며칠을 머물러 있었더니 하루는 그 아들이 도망가서 간 곳을 알 수
    없었는데 그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 말하고 끝내 뒤밟아 쫓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비가 되돌아가보니 있지 않아서 사방으로 찾아 보았으나 얻지
    못한 것이 지금 2년에 이르렀습니다.

    금년 4월 27일 날이 저물었는데 한 조그만 아이가 신의 아비집에 구걸
    하는지라 계집종이 처음 보니 곧 전에 잃어버렸던 김산이었습니다"

    여기서 분명 박중림이 그 부친 박안생의 시묘살이를 전의 남촌에서 하였다
    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미 세종 21년(1439) 9월 27일에도 박팽년은 집현전 부수찬(정6품)
    의 자리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은 성품이 본래 어리석고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이 없는데 갑인년(1434)에
    다행히 친시과(임금이 직접 선발하는 과거)에 올라서 외람되게도 집현전의
    반열에 함께 서게 되니 은혜가 넘치는데 이르렀습니다.

    다만 신이 학술이 거칠고 엉성하므로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한가
    하게 거처하며 독서할 뜻이 있었으나 머뭇거리고 말하지 못하여 이제 몇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신의 아비가 상을 만나 전의현에서 시묘를 살고 신의 어미가 따라가서
    역시 본현에 있는데 또 묵은 병이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벼슬산다면 어떻게 마음을 다 하겠습니까.

    이에 시묘사는 곁에 쫓아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살펴 묻고 또 어미의 탕약을
    받들어 아침 저녁으로 보살피고자 합니다.

    다행히 남은 힘이 있다면 학업을 대강 연구하여 성상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의 속마음을 헤아리시고 신의 직책을
    면하게 하시어 구구한 소원을 이루게 하신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여기서도 박중림이 친상을 당하여 전의로 내려가 시묘를 산다 하였으니
    모친상을 당하여 그 산소를 전의에 모시고 시묘를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때 박팽년이 비록 면직을 윤허받고 전의로 내려가 그 부모를
    모시고 함께 조모의 산소에 시묘살지는 못했다 하나 잠시 휴가를 받아
    수십일동안 전의에 머물면서 부모와 형제를 만나고 오기는 하였던 듯,
    "박선생유고"의 "동생에게 주는 시의 머리글(증사제시서)"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전의현 읍치 남쪽 금곡(쇠골)에서 시묘를 사시니 아우 3인이
    쫓아가서 수업을 받았다.

    구수(박인년의 자)가 그 맏이고 송수(박기년의 자), 교수(박대년의 자)가
    그 다음다음이다.

    접때 내가 서울에 있었고 세 사람이 모두 시를 보내 왔었는데 시어와 시의
    가 모두 아름답기에 읊기를 마지 않다가, "이 사람들이 본래 어리석고
    어두웠었는데 이에 또한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여러 요우
    들에게 이를 보여주니 모든 사람들이 놀라 탄복했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일컫기를 선비는 3일을 헤어져 있으면 문득 마땅히
    눈을 씻어야 한다고 했다더니 이를 두고 일컫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런 연후에야 그들이 변화한 것을 믿었었다.

    남쪽을 바라보며 서로 그리워하기를 오래하다가 경신년(1441) 추7월에 내가
    근친하러 이곳에 와서 수십일을 머물면서 부모 모시는 여가에 세 아우를
    이끌고 산정에 앉아서 공부한 것을 이끌어 그 뜻을 토론하고 싯구절을
    잇대어 지어 그 기상을 살피니 대개 그 사람들이 학문과 사어가 빼어나서
    전날과는 사뭇 다르다.

    다른날 진보할 바를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여기서 박중림의 모친의 산소가 전의현 읍치 남쪽에 있는 금곡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 부친의 산소가 있다는 전의현 남촌이라는 곳이 바로
    이 금곡인 것을 알 수 있다.

    금곡은 전의읍지인 "전성지"에서 남면 하송동 중송동 상송동으로 표기한
    현재 전동면 송성리 일대일 터인데 금성산 혹은 철성산으로 표기된 쇠성골로
    부터 연유한 지명일 것이다.

    전의읍치에서 20리 내지 22리 떨어진 곳이라 하였다.

    어떻든 박중림은 이곳 전의에서 나고 자라서 세종5년(1423) 계묘 식년시에
    을과 3인중 2등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인수부승(종 6품)으로 즉일 발령받는
    영광을 누리며 벼슬길에 나가는데 이때 나이가 24세 정도였을 듯하다.

    그런데 이에앞서 박중림은 충청도 신창(현재 충남 아산시 신창면 일대)의
    명족이던 김익생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어 태종 17년(1417)에 장자인 취금헌
    박팽년을 낳는다.

    그런데 박중림 자신이 그랬듯이 박팽년도 신창의 외가에서 탄생한 듯하니
    박팽년이 28세되던 해에 집현전 부교리(종5품)로 있으면서 신창 부근의
    군수자리로 내려보내 줄 것을 요청한 "걸군장"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부를 옮겨 보겠다.

    "신은 포대기에 싸였을 때부터 외가에서 자라났는데 외조부의 나이 이제
    70이고 외조모의 나이는 이제 74세이니 볕이 질 때가 가까웠으나 달리 뒤를
    이을 자식이 없고 오직 신의 어미 뿐이라 신으로 자식을 삼아 어루만져
    길러 내었으니 난 바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옛 제도에서는 비록 빗댈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정을 따진다면 진실로
    슬프고 불쌍하다 하겠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 풍속이 어머니 친족을 위해 정과 예가 심히 무거운 것은
    중국에 비할 바가 아님에서 이겠습니까.

    비록 친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양육을 받았다면 부모라 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친부모의 부모이겠습니까!

    신의 외조부와 외조모는 충청도의 신창현에 살고 있는데 금년 봄에 신이
    초수(청주의 초수리, 2월28일 세종과 왕비 심씨가 이곳으로 행행하였다가
    5월7일에 환궁하였다. 왕세자와 안평대군, 집현전 학사들이 호종하였다)에
    호종함에 가서 뵙는 것을 허락하고 또 먹을 것을 내려주시니 한갓 신의
    마음의 감격뿐만 아니라 신의 부모와 외조부모의 감격이 천지에 미치도록
    지극하여 눈물 콧물이 턱까지 섞여 내렸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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