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응 <금융연수원 부원장>

우리 경제는 지금 대단히 어려운 국면에 있으며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강력한 구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데에는 금융기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즉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기관들이 최대한의 창의역을 발휘하여 전망이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구분하여 그에 어울리는 자금배분을 해주지
않고는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금융기관들이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려면 먼저
이들의 자본금이 충분히 확충되도록 하여야 하고 이들이 구조조정에 참여하여
자기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겠다는 이윤동기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이 두가지 문제는 금융기관 좁게는 은행에 확실한 "주인"을 찾아 주는
것으로 쉽게 해결되는 것인데 이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금융기관들이 최대한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율화폭을 과감하게
넓혀 주지 않고는 이들의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은 하루도 지체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므로 이 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금융자율화와 은행의 "주인 찾아주기"가 무엇보다도
먼저 추진되었어야 할 일이다.

금융제도의 발달과정을 보아도 사회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 금융기관이
먼저 생겨났고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앙은행과 금융감독기관이 만들어졌음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지금 우리나라에서 금융자율화문제에 앞서서
중앙은행과 금융감독기구문제를 먼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일의 선후가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재경원이 겉으로만 금융을 자율화하여 모양을 갖추어 두고 사실상으로는
재경원의 "금융지배"를 영구화할 의도가 없다면 중앙은행문제와 감독기구
문제는 현재대로 남겨둔채 금융자율화를 단행한 후 그것이 발전하는 방향에
따라 그에 맞추어 고쳐도 늦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렇게 순서가 잘못된 것을 제처두고 중앙은행독립문제와 금융감독기구문제
그 자체만을 보아도 현재 재경원이 제시히고 있는 방안은 잘된 것이라고
볼수 없다.

중앙은행은 "명실상부"하게 독립되지 않는 한 그가 담당하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특수한 존재이다.

선진국들의 중앙은행과 관련된 경험은 "적당히 독립되는 정도"로는
중앙은행이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해낼 수 없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를 진정으로 자유화하고 금융도 아무런 숨겨진
"끄나풀"없이 자유화하기로 한다면 그 후 상당한 기간동안은 대출수요의
폭발, 물가상승압력의 현실화 등이 경제구조조정문제와 뒤얽혀서(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계속해서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제들은 물가상승률이 낮은 수준에서 안정되고 이에 따라 금리도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큰 변동을 보이지 않고 유지되어 경제적 불안감이
최소수준으로 억제될 때 보다 순조롭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 일을 중앙은행이 제대로 완수할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국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야 한다.

정치가들의 영향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것이므로 앞으로 아무리
큰 기업이 쓰러지고 은행이 망한다 해도 중앙은행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돈을 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물가가 오를 가능성은 것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국민이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중앙은행이 할일은 그만큼 쉬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을 겉으로는 독립시키고 내용적으로는 그렇지 못하게
한다면 중앙은행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므로 이들이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재경원이 헌법의 규정을 열거하면서 또는 중앙은행은 "정치로부터
독립"해야지 "정부로부터 독립"해서는 안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중앙은행에
완전한 독립을 주는 것을 반대한다면 현재의 한국은행법을 고칠 아무런
실익이 없는 것이다.

중앙은행에 독립을 주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3권분립과 같이
국가통치권을 어떻게 조직하는 것이 국민복지 향상에 더 도움이 되느냐 하는
문제임으로 이 문제는 국민이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영국이나 불란서는 얼마전까지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기관이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 중앙은행에 독립성을 주기를
거부하였었다.

국민투표를 한다는 것이 비용과 인력면에서 큰 대가를 치르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중앙은행 독립문제를 재경원과 한국은행
양기관의 "밥그릇"싸움으로 치부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민이 판단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문제를 그대로 두면 경제는 조만간 마비될 것이고 경제가 마비되면
그에 따른 희생은 결국 국민이 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보아도 이 문제는
가능한 짧은 시일안에 국민투표로 해결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여기에 소모되고 있는 국력을 더 긴급한 해결이 요구되는 다른 경제문제로
전환시키는 이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