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 적용대상으로 지정됨에 따라 한보사태이후
삼미.진로.대농.한신공영의 충격을 간신히 견디어 왔던 금융시장은 가히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부채를 상환할 것이라는 신뢰를 생명을 하는 금융시장에서 차입기업에
대한 신뢰가 총체적으로 붕괴되고 있으니 가히 신용공황이라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특별한 대책이 없고, 금융기관들은 기업에게
대출해준 자금을 서둘러 회수함으로써 다음 대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어떤 주체가 어떻게 이 상태를 수숩하여 금융시장을 정상화할 수 있는가?

대기업들이 연쇄적으로 "사실상 부도사태"에 빠지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실물측면에서는 안정과 개방을 배경으로 거시적 구조조정과정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채의존도가 높은데 대하여 과잉투자나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은 경기후퇴
과정에서 심각한 매출부진과 자금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둘째, 금융기관의 경영과 대출행태가 현저하게 변화하였다.

책임경영이 중시됨에 따라 자산의 건전성 확보에 경영의 역점이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따라서 부실자산을 만들지 않기 위해 차입기업에게 무작정 끌려가던
금융기관들은 건전성을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여신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행태로 변화하였다.

셋째, 금융기관들의 여신행태 변화에 따라 금융시장의 자금공급 긴장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황과 구조조정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현재와 같이 신용질서의 안정을
위험할 만큼 금융제도의 금융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을 미친 적은 없다.

1960년대말에서 70년대 초에 걸친 부실기업정리와 72년의 8.3조치, 그리고
80년대 전반의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은 기업들의 부실이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협하는 사태로 발전하기 이전에 정부가 개입하여 기업부채를 정리해주었기
때문이다.

현재 실물경제의 구조조정이 신용공황으로 파급되고 있는 본질적인 이유는
정부가 구조조정에 직접 개입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금융기관의
역량이나 금융시장의 구조가 구조조정을 감당할 수 있는상태가 되지 못하는
여건하에서 실물경제의 구조조정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부실에 대한 금융시장의 사전적 조정기능은 주로 M&A시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는 대기업 M&A시장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 사태의 본질은 경제운영의 주도력이 정부에서 시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어느 것도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시스템의 공백이 초래한 결과라고
하겠다.

특히 이번 기아사태는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 지도력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정부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정책도 지도력도 없이 기업들에게 재무구조를
개선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에게 평소 체력을 소홀히 했음을 나무라고
체력단련을 하라고 몰아붙인다고 해서 의사의 책임을 다한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줄만한 세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첫째, WTO체제로 인하여 정부가 개발체제에서와 같이 개별기업의
구조조정에 개입하거나 이와관련하여 은행을 지원해 줄 수는 없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문제를 외면하고 시장에 진적으로 내맡겨서도
안될 것이다.

정부는 책임과 지도력을 확보할만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셋째, 장기적으로는 M&A시장 등 기업퇴출시장을 육성하되 단기적으로는
기업들은 자구노력을 통해 금융기관과의 신뢰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사전적
구조조정에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가능한 대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인이 구조조정을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의 부재에 있다면,
그 해답도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효율적인 M&A시장의 구축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 당장에 가능한
대책은 부도유예협약을 주축으로 하는 금융기관들의 협조체제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주거래은행의 자금력만으로는 부도사태의 발생을 막을 수도 사후적으로
수습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단사태가 발생하면 결국 모든 금융기관이 부실자산의 문제를
안게 된다.

따라서 금 융기관들의 공조제제가 활성화되지 않는 어떠한 대안도
어떠한 금융기관도 무실자산사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부노유예협악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도유예협약이 최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정부개입으로부터
시장중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만들어진
차선의 대책이다.

부도유예협약 때문에 기업의 자금난이 더욱 심각해지거나 부도위험이
높아졌다는 것은 사건의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둘째 정부는 부동산시장을 통해 기업의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정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구조조정의 관건은 부동산 매각에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금융기관의 차입에 허덕이고 있으며, 또한 부동산을
매각해야 구조조정 자금이나 인수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이 성업공사에 부동산을 매각하고, 성업공사가 부동산 대금으로
발행하는 재무증서를 금융기관의 채무상환에 사용하거나 기업인수대금에
대신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부도유예협약을 통해 금융기관들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에도
정부는 금융기관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행에 필요한 지원을 보장함으로써
금융기관들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넷째 정부는 금융시장의 안정을 확보하는데 확고한 정책을 보여야 할
것이며, 특히 신용불안이 실물경제활동의 마비상태로 확산되지 않도록
신성어음에 대해서는 한은특용을 통해서라도 조속히 지원함으로써
협력업체들의 연쇄부도사태를 예방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