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3년 (1454) 4월2일에 본국 출신의 명나라 환관인 고보와 정통이
칙사가 되어 왕비 송씨의 고명과 관복을 가지고 의주에 도착한다.

이때 왕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연일 사냥이나 다니고 있을 때였다.

수양은 이들이 온 것을 호기로 삼아 이들을 매수하는 일에 착수한다.

우선 4월22일 도승지 신숙주를 벽제역으로 보내어 이들을 맞이하게
하는데 신숙주가 어떻게 요리해 놓았던지 이들은 23일 고명을 전하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 24일에 왕궁보다 먼저 수양의 저택을 방문하여
인사하는게 어떻겠느냐고 신숙주에게 묻는다.

신숙주는 편할대로 하라고 한다.

이 어찌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예법을 아는 시종신의 대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미 국왕을 국왕으로 보지 않는 참람한 언행이었다.

수양은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던지 왕궁부터 먼저 가야 한다고
사양하며 27일에 신숙주로 하여금 임금께 청하여 경복궁 사정전에서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인 온짐연을 베풀도록 하고 그 다음날인 28일에
이들 사신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많은
선물을 바친다.

임금이 양 사신에게 내린 선물은 고작 안장 갖춘 말 한필씩과 칼
한자루씩인데 수양이 저들에게 바친 선물은 안장 갖춘 말 한필, 쥘부채
50자루,칼 한자루,두꺼운 종이 백장,인삼 열근,검은 삼베와 흰 모시 각
5필, 화문석 5장씩이었다.

누가 임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더구나 가관인 것은 신숙주가 임금이 내린 술을 가져와서는 임금의
말이라고 전한 내용이다.

"수양군은 내게 공로가 있어 나라를 맡겼는데, 대인이 내 뜻을 알아주니
나는 매우 기쁘다".

이에 대해 사신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이 이곳에 와서 수양의 충성을 보니 정말 우연이 아닙니다.

전하의 위임은 당연합니다.

천하가 모두 수양의 공과 충성을 알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수양의 인삿말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수양의 공은 천하가 다 아는 바로 황제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조정에서 시끄럽게 일컫고 있는 까닭에
우리도 자세히 들었습니다.

천하는 수양군을 당나라 이정에 비견합니다"

이쯤 되었으니 명나라 사신들이 완전히 수양의 술수에 농락당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수양은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저들이 요청하는 대로 5월3일에는
궁중에서 기르던 흰 매도 보내주고 윤 6월3일에는 금강산 그림도 화원
안귀생에게 그려주게 한다.

이러는 사이에 금성대군과 화의군 및 혜빈 양씨, 상궁 박씨 등 마지막
남은 단종 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해 5월26일 계양군과 파평위 윤암이
수양에게 가서 이들을 제거하라고 간곡히 아뢰게 한다.

이들을 제거하라는 것은 곧 대권을 탈취하라는 말이었다.

이에 수양은 윤 6월11일을 대권 탈취의 날로 정하고 윤 6월10일에 기묘한
인사를 단행한다.

중국어에 능한 성삼문의 처숙부 김하를 예조판서로, 집현전 부제학으로
단종의 보호에 열성을 보이고 있는 하위지를 예조참의에, 성삼문을
동부승지로, 단종의 외숙부 권자신을 호조참판으로 발령한 것이다.

단종의 근위세력인 그들로 하여금 대보를 빼앗아 자신에게 바치게
하려는 악랄한 계책이었다.

윤 6월11일 드디어 수양은 우의정 한확 등 역신들과 빈청에서 회의하고
나서 혜빈 양씨, 상궁 박씨, 금성대군 유, 한남군 어, 영풍군 천,
동지중추원사 조유례, 호군 성문치 등이 반란을 도모했다고 발표한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합계하여 이들의 처벌을 계청하는데,
그들의 죄상이라는 것이 다음과 같다.

금성대군은 무사들과 몰래 사귀고 혜빈과 교결하였으며 그의 양모인
의빈 박씨 (세종 후궁, 박강생 <1369~1422>의 제 4녀)및 상궁 박씨와
왕래하면서 한남군 영풍군 및 영양위 정종과 연결하여 변란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혜빈은 문종조 이래로 궁내를 천권하여 불법을 범한 일이
헤아릴 수 없는데 대신이나 종실의 의견을 기다리지도 않고 의빈의 친척인
박문규의 따님과 금성대군의 처족인 최도일 (금성대군 장인 최사강
<1385~1443>의 장손)의 따님으로 왕비를 삼으려 하다가 되지 않자 자기가
세운 중궁이 아니라 하여 백가지 꾀로 이간하였다는 것이다.

이기사 내용으로 보면 이미 문종은 단종의 배필로 박문규나 최도일의
따님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 것을 수양이 단종을 감시하기 위해 강제로 송씨를 왕비로 삼았던
것이니 세종왕비 소헌왕후 승하후에 궁중의 내정을 총괄해온 혜빈 양씨가
새 왕비를 곱게 보았을 이치가 없다.

오히려 왕비의 감시로부터 단종을 보호하려고 더욱 예민하게 대처하였을
것이다.

이에 수양은 혜빈과 금성대군을 처단하지 않고서는 대권 탈취가 불가능한
것을 알고 이렇게 강력하게 그 처단을 요구하고 이 날로 이들을 각처로
귀양보내도록 강요하니 어린 단종은 겁에 질려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혜빈 양씨는 청풍으로,상궁 박씨는 청양으로, 금성대군은 삭령으로,
한남군은 금산으로, 영풍군은 예안으로, 영양위는 영월로 귀양을 떠나게
되니, 이제 어린 단종은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게 되었다.

14세 어린 임금이 자신을 돌보아온 친근한 보호자들을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처단한 흉적들에게 둘러싸여 있게 되었으니 그 공포가 얼마나
컸었겠는가.

그것이 바로 대권을 탈취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단종은 겁에 질려 수양측에 가담한 환관 전균으로 하여금 대임을 수양에게
전하겠다는 뜻을 한확에게 통보하게 한다.

확 등이 놀라는 척 하고 수양이 사양하는 척 하는 연극을 거치면서
대보가 수양의 손으로 건네지는데 상서원에서 대보를 가져오는 직무는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이 담당해야만 하였다.

수양 일파의 악랄한 계교가 아닐 수 없다.

성삼문은 이때 통곡으로 어보를 바치면서 후일 복위를 마음속으로
다짐하게 된다.

경회루 아래에서 단종으로부터 어보를 전해 받은 수양은 곧 근정전에서
수선의식을 치르고 단종으로 하여금 좌승지 박원형 (1411~69)을 명나라
사신이 묵고 있는 태평관으로 보내어 이 사실을 통보하게 한 다음
근정전에서 즉위한다.

이미 철저하게 매수해 놓은 명나라 사신들이 이의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이런 대권 탈취를 합법적인 것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여
인정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 재위하고 있던 명나라 대종 경태제는 탈탈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형황인 영종을 상황으로 모시고 있었으니 수양의 이런
찬탈행위에 너그러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세조가 즉위하여 제일 먼저 내린 전지가 혜빈 양씨와 상궁 박씨의 가산을
몰수하라는 것이었다고 "세조실록"에 적고 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모두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및 혜빈 소생 왕자들에게 덮어
씌우는 비열함을 서슴없이 노출하고 있다.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처음부터 양씨의 여러 아들들은 교만하고 전횡하여 법을 지키지
않았는데 양씨가 노산군 (단종)을 보호하는 일로 궁액을 출입하자
요구하는 것이 만가지라 세조가 조금 금하여 절제하게 하였더니 양씨가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수춘군 현은 또 교만하고 미쳐서 말 안 듣는 놈들을 즐겨 모아서 날마다
술마시고 도박하였는데 또 용에게 몰래 붙어서 일찍이 계양군 증에게
이렇게 말했었다고 한다.

"주상이 어리고 약하며 병꾸러기라 안평이 이미 대신들과 몰래 의논하여
우리 어머니 혜빈으로 하여금 입궁하여 궁안의 일을 총괄해 다스리게
하였으니 의논은 이미 정해졌다.

또 안평은 베풀기를 좋아하여 널리 인심을 거두었는데 이제 또 안으로
궁금과 연결하고 밖으로 대신과 연결하였으니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으며 어떤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어째서 자주자주 나아가 뵙지 않는가.

수양은 비록 엄하고 분명하며 공정하다 하나 문에는 빈객이 없어
고립무원하니 한 필부일 뿐이다"

유는 집에 쌓아 놓은 재산이 거만에 이르렀으나 호탕방종하여 삼가지
않고 사치가 참람하여 군왕에 비기었는데 용과 정이 깊어 용이 패한 후로
항상 앙앙하더니 드디어 영과 협모하여 혜빈에게 몰래 뇌물을 주고, 안으로
궁인과 맺고 밖으로 환관과 연결하여 널리 당을 세워 돕게 하며, 무사를
불러서 혹은 활쏘기도 하고 사냥도 하며, 가산을 기울여 베풀기를 좋아하되
못미칠까봐 급급해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 꾀함을 알았었고 한명회는 일찍 제거하기를
청하되 호랑이를 길러 걱정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단종실록"에서는 혜빈이 안평의 모반사실을 밀고하였다고 기록해
놓더니 여기서는 어찌해서 혜빈이 안평과 교결하여 불궤를 도모했다는
것인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죄악을 앞뒤없이 형제들에게 전가하는 추악한 모습이
혐오스럽다.

대권탈취의 욕망이 한 인간을 이렇게 철저히 황폐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3일에 명의 정사 고보가 지휘 장웅을 명으로 보내어 신왕의 즉위
사실을 보고하게 하니 세조는 감격하여 고보와 정통의 증조이하 3대에게
벼슬을 추증한다.

20일에 상왕은 경복궁을 신왕에게 내어주고 창덕궁으로 이어하는데 23일
신왕의 첫 정사에서 한확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하위지를 예조참판, 성삼문을
우부승지로 올린다.

그리고 9월 5일 세조를 추대한 좌익공신을 정하는데 성삼문은 다시
3등에 이름이 오르는 수모를 당한다.

어보를 내다 바친 공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바쳐 보호하기로 서약한 주군으로부터 어보를 탈취하여 역신에게
넘겨준 공로로 반역자들과 함께 공신의 대열에 서게 되었으니 당시
성삼문의 심정이 얼마나 처참하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드디어 9월20일에 공신들에게 작위와 벼슬을 내리는데 성삼문에게는
추충정난좌익공신좌부승지의 작위가 내려졌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