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교수가 TV강의에서 ''똥''을 ''똥''이라 하고, 그 외에 우리가 드러내
말하기를 꺼리는 신체부위 이름을 그대로 말해 화제가 되었다.

더러운 말, 낯 부끄러운 말을 입에 올리지만 않으면 더럽지도 않은양,
금기의 뒤편에 숨어서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려던 우리에게 던져준
경고였을까.

아무튼 그의 솔직한 표현이 자못 신선함을 준다는 평이었다.

요즘 신문에서 가장 큰 활자는 교사의 촌지기록부 기사였다.

''그럴수가, 그럴리가''

''충격의 촌지장부'' - 이런 커다란 제목이, 충격에 둔해진 민심에
충격요법을 가하려는 듯 등장하지만, 필자는 이 기사에 정말로 충격을
받았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어 은근히 쓴 웃음이 나왔다.

교사가 알고, 학부모가 알고, 심지어 학생까지 아는 촌지 실태를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이번에 처음 알았던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코미디같다.

10만원, 20만원 하는 촌지 액수며 상품권 향수하며 신문을 메운 기사중
놀랄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그동안 들어서 알아 받아서 알고 주어서 아는 사실들이다.

가끔 한번씩 야기되면 극소수의 일이다.

교사의 사기를 죽여서야 되겠느냐며 꼬리를 감추던 촌지비리가 뚜렷한
증거로 나타나니 너무나 난감해서, 오히려 처음 듣느 것처럼 더 펄쩍
뛰는 것은 아닐까.

교육부도 검사도 직위해제한다, 수사한다고들 호들갑을 떨지만, 속으로는
모두들 왜 그런 기록을 남겨가지고 골치아프게 하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더욱 우스운 것은 바로 며칠 전에 돈봉부를 들고 갔던 엄마들조차 그럴수가
있느냐고 비분강개하는 점이다.

기자와 검사는 대부분 남자라 혹시 몰랐다 하더라도, 그 아내들은 한번씩은
촌지를 주어본 적이 있는 경험자이며 공범일텐데도 모두를 혀를 쯧쯧 차는
것이다.

필자도 역시 촌지를 주어 보았다.

외국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했던 두아이들 데리고 귀국해 초등학교에
전학시키면서 촌지를 주어야 하느냐, 아니냐로 여러사람의 충고를 들었는데
1백%, 전원이 주라는 것이었다.

찜찜한 마음으로 봉투를 전달했는데 큰 아이의 담임이었던 처녀 선생님은
아들편에 돈봉투를 돌려 보내왔다.

자신의 양심, 교육관을 길게 쓴 편지와 함께.

그 감동과 신선한 충격때문에 다음해에는 촌지를 전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아들이 받았던 상처를 여기에 쓰기는 적당치 않을 것같다.

자신이 어쩌다 당했던 일로 편파적인 견해를 보인다는 오해를 받을수도
있을 테니까.

대신 다음부터는 열심히 촌지를 챙겼다는 것과,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돌려주는 교사보다는 받는 교사가 더 편하더라는 것을 고백하겠다.

얼른 받으면 얄밉고, 두어번 사양하다 받으면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아울러 촌지를 받는 교사가 얼마나 당당한지도 밝히고 싶다.

다음은 초등학교 교사인 필자 친구의 말 그대로이다.

"과외공부며 학원이며 사교육비는 몇백만원씩 쓰면서 담임한테 주는
푼돈은 그렇게 아까운가"

"자기네는 그렇게 부자인데 담임한테 돈 좀 주는게 뭐가 문제인가"

"선물, 그런 거 들고오는 사람 귀찮고 얄미워, 돈이 최고야"

제발 그런 교사는 극소수라고 발뺌하지 말자.

무슨 비리가 나올 때마다 그것은 극소수라고 말한다.

사실은 대다수인 당사자가 너도 나도 극소수의 대열로 숨어버리게 하는
집단합리화가 아닌가.

또 어떤 교육자는 촌지문제는 그리 큰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교과내용, 가르치는 방법, 체벌문제, 학교폭력, 교사의 인격, 이런
여러가지 문제들이 우리앞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풀려면 우리는 우선 솔직해져야 한다.

똥을 똥이라고 그대로 발음하듯, 솔직하고 두려움없는 마음으로 현실을
바로 보며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