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은 국내에 국한돼 왔던 시론필자의 범위를 해외로 확대, 보다
객관적인 지구촌의 목소리를 독자여러분들께 전달하겠습니다.

그 첫번째 기고로 북한의 식량문제를 다룬 캐서린 베르티니 유엔세계식량
계획담당국장의 글을 싣습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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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고 듣는 이가 없는 숲속에서 한그루의 나무가 땅에 뜨러지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사람들은 오랜 논쟁을 벌여 왔다.

나무가 쓰러져도 이 사실을 알리는 사람이 없으면 그 사실 자체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묻혀 버릴 뿐 아니라 지나쳐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적 구조사업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는데 이른바 CNN 신드롬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을 제대로 보도할 TV카메라와 기자가 없다는 이유만
으로 재앙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고통이 덜 긴박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의 경우와 다를바 없는 것이다.

개인이건 정부건 구호에 나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곤경을 확인해야 구조를 요청하는 단체들의 요구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

불행하게도 2년동안 극심한 식량난을 겪어온 북한과 관련, CNN은 북한인들
의 재앙을 전세계에 알리는 적극적인 수단이 못되어 온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기근은 다음의 두가지 이유로 인해 그 모습이 공개되지 못했다.

첫째는 그 기근을 보도할 만한 언론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북한의 독특한 사회적 배급체계가 이같은 사회적 고난을 여러 지역
으로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한을 지탱해오던 사회적 배급체계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와해되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급박하게 됐다.

식량축적분은 이미 고갈된 상태고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인 남쪽지방
조차 배급이 하루에 1백g으로 줄어들었다.

동해안에서는 수거되는 해초가 주식이되고 있고 나뭇가지, 뿌리 등을
식용으로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지난 3월 내가 북한을 방문했을때 목격한 북한기근의 실상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기근의 최대 피해자는 보육원과 유치원의 어린이들이었다.

어린이들의 근육은 탄력성을 잃고 피부는 색깔이 변했으며 거의 혼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들 나이에 비해 키가 작았고 활력이 없었다.

일부는 영양실조때 나타나는 징후인 구릿빛 머리와 볼록 나온 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어린이들이 피부와 호흡기 질환, 기관지염과 설사병을 앓고
있었다.

유엔의 세계식량계획과 북한에서 구조사업을하는 유니세프의 관계자들은
어린이들의 결석률이 80%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북한의 관료들은 이제까지 사망자의 숫자를 밝히는 것을 대단히 꺼려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북한은 우리세대 최악의 기근을 경험하고 있다.

그 첫번째 희생자는 다름아닌 어린이들이 될 것이다.

북한에는 절박하게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6세미만의 어린이가
2백60만명에 이른다.

세계식량계획은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자선가들의 적극적인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까지 세계식량계획은 목표치인 9천5백40만달러중 5천4백만달러를
거뒀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대로 기금을 확보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긴급한
구조물량을 채우는 정도인 20만톤에 불과하다.

북한은 올해만 2천3백만톤의식량부족 사태를 맞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주민들이 굶어죽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간 대규모 긴급
원조를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북한에 대한 원조를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 북한당국에 대한 평판과 한반도 긴장의 역사를 고려하면 북한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엔식량기구의 대표로소 나는 북한을 돕는 문제에 대한 정치적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인도적 구조를 정치에 예속시키려는 이들에게 레이건의 말을
상기시키고 싶다.

"배고픈 어린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북한의 어린이들은 지금 그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정치에 대해 알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원조를 반대하는 이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치러야 할 죄값은 정치 엘리트나 군인들이 아니라 바로 이 어린이들
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어린이들이 죽는다면 북한을 약화시킬뿐 아니라 비록 CNN이
그곳에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을 구할수 있었던 인간성 마저
약화시키는 비극이 될 것이다.

< 정리 = 정용준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