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은 길이 꽃다운 인정을 받음을 의미하며"

고시와 같은 이 글을좋아한다.

해석이 매끄럽지 못해 얼핏 정확한 뜻이 쉽게 전달되지 않는 듯해도
나는 이 귀절을 즐겨 암송한다.

옛경전을 보면 "일찌기"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일찌기 공자께서 가라사대", "일찌기 맹자께서 가라사대".

성현의 말씀 앞에 놓여 다음 문맥이 풀어져 나오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이런 까닭에 옛어린이들은 "일찌기"만 봐도 그것이 성현의 말씀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나는 "일찌기"로 시작되는 글을 읽으면 천진한 어린아이가 아주 귀한
영혼으로 커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가 동몽에서 비로서 깨어나 글을 읽게 되는 과정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 기쁨을 읽게 돼 이 글을 사랑하는 것같다.

좌우명이 되는 문장도 좋아한다.

"착함이란 나를 겸허하게 하는 것이니라""인내하고 자중하여라".

이런 글을 읽으면 어느새 마음이 아늑하고 부드러워져 옴을 느낀다.

"뜻은 풀어 세상 이치에 닿도록 하라".

오랜 연륜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이같은 대목을 보면 나이테처럼 꽉 차지
못한 내 삶에 부끄러움을 갖게 된다.

"화목함이란"으로 시작되는 귀절도 좋아한다.

"화목함이란 바로 나를 낮춤이다" "큰 덕이라 함은 밝음을 향해 가는
이치이니 동녘처럼 밝은 가운데 있어야 으뜸으로 밝아지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아름다운 우리말이 고삐 풀린 듯 쇠락하고 퇴락해가는 것을 보게
될 때,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환락으로 향해가는 것을 바라볼 때 유교의
이같은 가르침은 내 가슴에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다가온다.

뿐이랴.마음속에 순수함이 고이지 않을 때, 내 이성이 세상의 혼탁함을
헤쳐 나갈 힘을 잃은 듯 느껴질 때 이 귀절의 의미들은 새삼 중요하고
절실하게 나의 것으로 살아난다.

유교의 가르침, 가훈으로 내려오는 옛글을 낡고 고루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