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는 다시 노동운동의 계절이 돌아왔는가''

노동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으니 당연히 나올법한 질문이다.

하지만 영국 국내는 물론 영국사정에 밝은 미국이나 유럽언론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노조가 옛 영광(?)을 되찾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아니라 과거를
재현하려는 움직임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시각이다.

영국의 노조는 과거 노동당정부가 들어서면 으레 정권을 나눠
갖다시피했었다.

60, 70년대 윌슨이나 캘러헌노동당 정권시절 다우닝 10번가에는
노조지도자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총리는 노동문제뿐만아니라 경제 전반에 결쳐 노조지도자들과 의논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겼다.

노조는 그래도 수가 틀리면 총파업을 무기로 정권을 좌지우지했었다.

그렇게 발언권이 셌던 영국의 노조가 새 노동당정권이 출범했는데도
숨을 죽이고 있을까.

보수당 18년간 노조길들이기가 워낙 철저했던 탓으로 지금 영국의 노조는
과거와 비교하면 반신불수나 다름없다.

법적 제도적으로 뿐만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노동당 정권이 들어섰다고해서
목소리를 낼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져 버렸다.

게다가 이번에 총선을 승리로 이끈 토니 블레어에게도 별로 기대할게
없는 실정이다.

신임총리는 야당 당수시절부터 "토리(보수당의 별명)블레어"로 불려온
사람이다.

그는 노조와 손잡고 정권을 창출해온 노동당선배들의 전략을 미련없이
버렸다.

그는 지난 7일 당선 축하연설에서 "낡은 뿌리(노조와의 유대를 중시하는
성향)에 연연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노선을 채택한지
오래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타임지는 "마거릿 대처가 닦아놓은 길을 가기로
서약한 대가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고 분석했을 정도다.

블레어는 노조를 멀리하는대신 보수당의 지지기반을 파고들었다.

그들에게 먹히는 보수당의 시장경제원칙을 거의 그대로 채용했다.

그가 내건 "뉴 레이버(New Labour : 새로운 노동당)"라는 슬로건은
유권자들에겐 "강성 노조와 인연을 끊은 노동당"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94년 노동당 당수직에 오른 토니 블레어는 노동정책과 관련된
핵심강령을 포기해버렸다.

산업의 국유화정책(생산수단의 공동소유)을 버리고 시장경제의 원칙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보수당처럼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통한 노조의 무장해제와 가차없는
인원정리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 개혁은 여기서 끝나지않았다.

노동당에 대한 노조의 입김을 원천봉쇄하는 당제도개편을 끊임없이
추진해왔다.

우선 노동당 지도부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노조가 행사하는 투표지분을
40%에서 30%로 끌어내렸다.

동시에 당의 각종 의결과정에서의 노조 몫을 70%에서 50%로 낮췄다.

노동당 스스로도 이처럼 노조와의 결별수순을 밟아왔지만 지금 노조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 것은 역시 보수당의 노조버릇고치기가 주효했던
탓으로 봐야한다.

영국의 인디펜덴스지는 "역대 노동당정권이 집권 당일부터 고민하게
마련이었던 노조문제를 이번엔 조용히 넘어갈수 있게된 것은 뭐니뭐니해도
마거릿 대처(보수당)덕분"이라고 분석하고있다.

지난 79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은 영국경제를 병들게한 가장 큰
책임이 지나친 권력을 행사해온 노조에 있다고 진단했었다.

대처정부는 클로즈드 숍(노조의무가입)제도의 폐지와 최저임금제의
포기를 시작으로 노조의 기반을 조직적으로 위축시키는 한편 노사협상제도를
사용자중심으로 전면 개편해버렸다.

다른기업의 조합원들이 동조시위를 벌이는 경우 사용자가 법원에 고소할수
있도록하고 조합장은 반드시 비밀투표에 의해 선출하도록 법률로 못을
박았다.

대처는 유럽연합(EU)의 사회보장협약을 거부했을 정도로 영국의
노동시장개혁에 집착했다.

그 결과 보수당집권 초기 1천3백30만명을 헤아렸던 노조원수가 지금은
7백30만명으로 줄었다.

18년전 연간 1천5백회에 달했던 파업건수가 작년엔 1백회아래로
떨어졌다.

대처의 노동정책은 완전 성공이었지만 이는 결국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할수밖에 없었다.

영국언론들은 "노조로선 토니 블레어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보수당이
또 집권하는 것은 막아야한다는 일념에서 노동당을 적극 밀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80, 90년대를 통해 영국의 산업구조가 격변한 것도 노조의 힘을 위축시킨
또다른 요인이었다.

그동안 영국경제는 제조업중심에서 서비스중심으로 완전히 개편됐고
이 과정에서 노동시장의 유동성이 크게 높아졌다.

파트타이머 임시직 여성인력의 노동시장 진출이 급증하면서 노조가입률이
계속 떨어졌다.

이제 집권 노동당이 노조와 완전 절연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직 당비의 상당액을 노조에 의존하고있고 이번 선거에서도 조용히 표를
몰아준 노조의 숨은 공을 모른체 할수는 없어 보인다.

토니 블레어는 최저임금가이드라인설정등 몇가지 보답을 준비중이지만
노조와의 거리를 지금보다 더 좁힐 것같지는 않다.

< 이동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