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백 한림대교수의 "한국사신론", 한우근 전서울대교수의 "한국통사",
변태섭 전서울대교수의"한국사통론"에 이어 네번째 한국통사가 나왔다.

한영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집필에 착수한지 14년만에 내놓은"다시
찾는 우리 역사"(경세원,1만9천원)이 바로 그것.

앞의 책들이 해방후 국사학계 1세대의 의한 것이라면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60년대 이후 학문활동을 시작한 국사학계 2세대를 대표하는 학자가
집필한 책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교수는 "편협한 국수주의와 주체성이 결여된 세계화론을 경계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집필동기를 밝혔다.

"5천년 한국역사는 공공성이 확대되는 과정이었며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은 옛 것을 토대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법고창신와
온고지신이었다."

그는 한보사태로 대표되는 한국의 정치상황을 위기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문민통치 이념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왕조가 사색당쟁과 문약(문약)에 빠져 망했다는 사관은 하나의
편견이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배층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장치가
잘 발달된 문민정치의 한 모델로 볼수 있다."

한교수는 유교입국의 조선왕조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519년간 장수를
누렸다는 사실은 조선이 고도의 합리적 정치를 구현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설명했다.

조선조 당시 합리적 정치를 가능토록 했던 대표적인 제도로 그가 예를
든것은 완벽한 기록주의와 언론의 감시기능, 최고통치자에 대한 끊임없는
재교육, 철저한 사정제도등 4가지.

한교수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등에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 사적인 이해관계가 공적인 정치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비변사득록등으로 통치행위에 대한 언론의 감시기능이 충실히 수행됐다.

그는 "최근 정치행태와는 달리 조선조엔 공과 사를 확연히 구분, 뇌물로
사리를 채운다든가 왕의 아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봉쇄됐다"고지적했다.

왕이 뛰어난 학자들과 토론을 지속,학문수양을 계속하도록 하는
경연제도와독립적인 사정활동이 가능했던 사헌부의 존재등은 문민정치를
지탱한 또 하나의 축이었다고 한교수는 설명했다.

이러한 조선시대 문민정치의 이념이 현대에 들어와 실종한 것은 주체성을
상실한 세계화전략에 기인한다고 그는 분석했다.

그는 "배경이 판이한 서구 개인주의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책임은없고 방종만이 판치는 세상이 됐다"며 "지금이야말로 명.청의
문물은 받아들이면서도 한글창제등으로 민족정체성을 지키려한 선조들의
노력을 본받아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다시 찾는 한국 역사"가 10번째 저서인 한교수는 조만간 자신의
역사철학을 담은 에세이집 "먼저 한국인이 되자"(지식산업사)을 낼 예정이며
올해안에 "정도전 사상 연구"(서울대출판부, 73년)를 대폭 개정, 쉽게 풀어
선보일 계획이다.

<박준동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