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가 아내와의 약속을 지켜 11시10분쯤 룸을 나가버리자 박미자는
해방된 민족처럼 휘파람을 불며 제인으로 돌아와 샤워실로 간다.

그녀는 두번 세번 질속까지 깨끗이 세척을 한후 "나는 이제 제인이다"
하고 소리를 친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최고의 서비스를 다 한 대가로 택시비만 남기고
주머니를 톡톡 털어놓고 가게 했다.

사실 초이는 자기돈은 아니지만 마누라덕에 죽을 때까지 먹고 써도
남을 만한 상속재산을 가지고 있다.

모든게 자기보다 더 부자인 마누라의 덕이다.

야무진 명회장이 장가 한번은 잘 들여준 셈이다.

명회장에게 해초녀석은 바보같은 데다 사진작가라는 직업도 요새야 겨우
획득한만큼 독립을 시키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라도 인생경영을 해줘야 할
개망나니 막내아들이다.

정확하게 초이가 나간지 20분만에 제인은 기분이 상쾌해져 날아갈
것같이 되어 호텔의 문을 나선다.

호텔 보이가 갑자기 달려온다.

이 호텔은 압구정동에서 걸어가는 거리에 사는 신사들이 시간 절약상
잘 이용하는 위치라서 그녀도 네번쯤 온 곳이다.

"여보십시오, 아가씨. 잠깐 부탁의 말씀이 있는데요"

그녀는 약간 높은 코를 쳐들고 뒤돌아본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부끄러워 하거나 머뭇거리는 법이 없다.

사뭇 치외법권자 같은 태도다.

그녀의 의식은 언제나 외국인같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물어보세요"

그녀의 매너는 우아하고도 기품에 넘친다.

호텔의 룸서비스는 순간 자기가 실수라도 하는게 아닌가 하여 머뭇거린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 아닌가.

너무나 잘 빠진 몸매며 얼굴의 아름다움에 호텔 보이는 또 다시
머뭇거린다.

자세히 보니 정말 뛰어난 미인이다.

"저..."

"전 시간이 남아돌아가는 숙녀가 아닙니다. 거북해 마시고 말씀하세요"

햐, 이건 아주 굉장한 숙녀로구나.

외국여자가 한국말을 하는 것같기도 하면서 프레시하다.

누가 그녀를 돈때문에 몸을 파는 룸살롱의 아가씨로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저,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을 드려봅니다. 아니라면 그냥 말없이
걸어나가시면 되구요. 사실은 우리 사장님께서 아가씨를 한번 보고 아주
뿅 갔거든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혹시 아까 그분과는 애인
사이신가요?"

그러자 제인은 갑자기 파안대소하면서, "저, 그러니까 요기 이 호텔의
사장님께서 나에게 반했다 그 말인가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