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최윤덕의 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조선조 초기만 하더라도 공직자로서의 분수를 지켜 청렴한 삶을 살다간
순.무신들이 적지 않았다.
순신으로는 맹사직 황요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무신으로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북방 반경을 개척하고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하는 등 국방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우뚝한 업적을 남긴 정열공 최윤덕 (1376~1445)을 들수 있다.
병조판서로서 여진을 정벌한 공로로 우의정으로 특진된 정렬공은 무관이
재상의 직에 있을수 없다는 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2년뒤 좌의정으로
승진되어 령중추원사로 전임했다.
공은 그처럼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도 성품이 근검하여 여가가 나면 묵은
땅에 농사를 지어 스스로 양식을 마련할 정도로 청렴한 공직자였다.
공의 뛰어남은 미래를 내다보는 깊은 견식에서도 나타났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철에 앞서 왜국의 침략을 예견하고, 세종에게
축성의 필요성을 진언하여 군사요충지에 성을 쌓게 함으로써 축성대감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공은 경남 창원에서 무관인 최운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 수비에 나가 있어 한 마을의
다른 집안에 맏겨져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솜씨가 뛰어났다.
어느 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만난 호랑이를 화살 한발로
쏘아 죽이기도 했다.
공은 그처럼 무예에 출중한 자질을 지녔다.
공은 당시 대학자였던 권근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9세때 회시에
합격했으나 아버지를 따라 참가한 왜구토벌전에서 여러번 전공을 세워
훈련원부사직에 제수된 뒤 당장 호군 대호군으로 승진했다.
부친의 상중인데도 3년 시묘를 끝내지 못하고 나라의 부름을 받을만큼
변방수비에서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34세때 뒤늦게 무과에 급제한 공은 상호군 동북면병와사 우군총제
중군도총제를 거쳐 세종조엔 의정부참관 공조판서 평안도절제사
좌군도총제부사 병조판서로 승진가도를 달렸다.
정렬공은 한마디로 세종의 치세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게
안정기반을 다지는데 우뚝한 공훈을 세운 인물이었다.
정부가 정한 "최윤덕의 달"인 3월을 맞아 그의 공직자로서의 정신이
오늘에 드리워지길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일자).
순.무신들이 적지 않았다.
순신으로는 맹사직 황요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무신으로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북방 반경을 개척하고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하는 등 국방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우뚝한 업적을 남긴 정열공 최윤덕 (1376~1445)을 들수 있다.
병조판서로서 여진을 정벌한 공로로 우의정으로 특진된 정렬공은 무관이
재상의 직에 있을수 없다는 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2년뒤 좌의정으로
승진되어 령중추원사로 전임했다.
공은 그처럼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도 성품이 근검하여 여가가 나면 묵은
땅에 농사를 지어 스스로 양식을 마련할 정도로 청렴한 공직자였다.
공의 뛰어남은 미래를 내다보는 깊은 견식에서도 나타났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철에 앞서 왜국의 침략을 예견하고, 세종에게
축성의 필요성을 진언하여 군사요충지에 성을 쌓게 함으로써 축성대감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공은 경남 창원에서 무관인 최운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 수비에 나가 있어 한 마을의
다른 집안에 맏겨져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솜씨가 뛰어났다.
어느 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만난 호랑이를 화살 한발로
쏘아 죽이기도 했다.
공은 그처럼 무예에 출중한 자질을 지녔다.
공은 당시 대학자였던 권근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9세때 회시에
합격했으나 아버지를 따라 참가한 왜구토벌전에서 여러번 전공을 세워
훈련원부사직에 제수된 뒤 당장 호군 대호군으로 승진했다.
부친의 상중인데도 3년 시묘를 끝내지 못하고 나라의 부름을 받을만큼
변방수비에서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34세때 뒤늦게 무과에 급제한 공은 상호군 동북면병와사 우군총제
중군도총제를 거쳐 세종조엔 의정부참관 공조판서 평안도절제사
좌군도총제부사 병조판서로 승진가도를 달렸다.
정렬공은 한마디로 세종의 치세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게
안정기반을 다지는데 우뚝한 공훈을 세운 인물이었다.
정부가 정한 "최윤덕의 달"인 3월을 맞아 그의 공직자로서의 정신이
오늘에 드리워지길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