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홍 <서울대 교수 / 행정학>

한보의 부도사태가 제기한 대출비리의 문제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산되고 있는 흑막의 의혹은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노동법 안기부법 파동으로 사회적 뒤틀림이 극심하던 판에
이런 사건까지 터졌으니 난감할 노릇이다.

한보사태가 초래한 경제적 타격은 물론이려니와 정치적.행정적 상황 또한
위기감을 주고 있다.

한보사태를 둘러싼 흑막 또는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 검찰이 나서고 있으며
국회도 나서고 있다.

이들의 조사활동이 또다른 의혹을 낳은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조사와 시정조치가 용두사미로 끝나서는 안된다.

멀고 가까운 원인들을 낱낱이 밝혀 치유책을 찾아내야 한다.

치유책의 강구가 단기적.미시적.처벌적인 것에만 국한되서는 안된다.

장기적.거시적 방안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이런 포괄적 대책을 마련하려면 조사활동부터 포괄적이어야 한다.

범법조사뿐만 아니라 정책 조사와 제도조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정책조사에서 주목해야 할 한보사태의 원인은 대단히 많지만 그 가운데서
몇가지를 여기서 강조해 두려 한다.

먼저 일부 무모한 기업인들의 탈선배경을 생각해야 한다.

도처에서 개발이익이 쏟아지고 그것이 무질서하게 배분되던 시대, 그리고
개발독재가 무소불위이던 시대에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돈을 번 기엄인들이
있다.

그들의 미분화된 정신구조는 산업화시대의 합리적 경제질서에 적응하지
못한다.

따라서 당연히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적응인, 문화지체인을 산업화시대의 국민경제에 큰 화근이 될수
있다.

그들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행정에 큰 봉변을 준 일이 한두번이
아닌데 아직도 정신들을 못차리고 있다.

그들을 특별히 감시하고 관리해야 할 당국자들이 오히려 그들의 농간에
넘어가 재난을 빚은 경우도 많다.

다음으로는 정부주도형 경제의 병리들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발전행정의 고조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그동안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가부장주의적 간섭은 확고해지고 체질화되었다.

기업은 정부의 존적으로 성장했고 금융은 관치금융이었다.

정부는 고도성장에 따라 생성.변천하는 경제적 이익의 분배에 깊이
간여하였다.

정부는 경제에 대한 지배자였다.

기업은 정부라는 "고양이"앞에 "쥐"였다.

강력한 지배자는 월권과 남용의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영합하는 경제인들이 어우러져 관재유착의 체제를 구축해 왔다.

그런 체제속에서 고양이가 쥐에게 물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고양이가 탐욕이 지나칠 때 무모한 쥐에게 물리게 된다.

폭로된 대형금융비리는 대개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경제에 대한 정치.행정의 무절제한 통제력이 이번 한보의혹의 기반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부의 과잉간여와 오도된 간섭이 개혁의 의제로 설정된지는 오래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부장적 간섭과 규제의 관성은 아주 강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은 개혁의 성과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규제완화를 위한 그간의 개혁노력을 전반적으로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한보사건의 해후에 의혹이 있다면 그것은 부패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체제화한 부패의 한 편린에 관한 이야기이다.

국가관리체제와 사회생활관계에 나타난 고도의 형식주의와 이원화구조는
체제화된 부패의 원인이며 동시에 그 결과이다.

이원화구조란 공식적기준과 실천의 내용이 심히 괴리되어 있는 구조를
말한다.

이런 구조화에서는 공식적인 것보다 비공식적인 것이, 공개적인 것보다
은밀한 것이 더 큰 무게를 지닌다.

우리나라에서 세금 제대로 내고 장사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은 누구나
하고 있다.

세금에 의한 통치뿐만 아니라 비자료에 의한 통치가 있었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우리에게는 지하경제가 있을뿐아니라 지하정치 지하행정이 있다.

지하부문끼리는 돈으로 연계된다 정치권력은 그 지하활동에서 검은
돈이거나 적어도 흐리멍텅한 돈을 필요로 한다.

어둠속에서 돈을 만지는 약은 쥐들은 정치권력과 야합한다.

그것이 지나쳐 꼬리가 잡히면 세상사람들은 비로소 관재유착이다.

의혹이다.

금융비리다하고 떠든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그것을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원화 구조의 병리를 척결하는 임무를 맡도록 만들어진 개혁적 제도와
조직들이 유명무실화된 경우가 많다.

개혁적 제도와 조직들이 규제대상 개혁대상에 오히려 사로잡혀 포로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다.

규제임무를 맡은 조직이 규제대상조직의 이익을 옹호하고 그 비리를
감싸는 일이 얼마나 있는지 보통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이러한 사로잡힘을 물론 부패의 온상속에서 일어나고 또 부패의 증식을
조장한다.

국가관리체제 전반을 감싸왔던 비밀주의가 또한 만병의 근원이다.

비밀이 있는 곳에 의혹이 있다.

비밀주의가 만연되어있는 터전위에서 특정사건의 배경만 명명백백히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체제 전반에 걸쳐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비밀이 걷히지 않는한 의혹은
꼬리를 물 것이다.

정책결정과정의 참여를 확대하고 과정진행의 투명성을 확보하지 않고
규제행정의 비밀주의를 고수한다면 한보사태와 유사한 사건은 앞으로도
되풀이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