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에서 김종서 탄핵을 포기한 사실을 알게된 박호문은 세종에게
참소한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 다시 그 내용의 대강을 김종서에게 귀띔
하면서 세종의 문책에 할수 없이 대답하였노라고 선수를 쳐서 왕과의
사이를 이간하는 책략을 쓴다.

이것이 계략인줄 알리 없는 김종서는 어이가 없어 세종 22년(1440) 1월
17일에 사헌부에서 탄핵하려 했었다는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해명
하면서 능력도 부치고 병도 깊어 이상 더 자리를 지킬수 없으니 사직을 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혼자만 알고 못들은 척하려 했던 세종은 놀라서 그 사실 내막을 도승지
김돈에게 물어본다.

김돈은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사헌부에서 탄핵하려 했던 내용이 십여가지
인데 첫째가 김종서의 사랑하는 기생에게 여진족이 뇌물을 바쳐야만 그들을
서울로 올려보냈다는 것이고, 둘째가 논밭을 나눠 주는데 김종서의 마음대로
하였다는 것이고, 셋째가 백일상을 마치고 진으로 돌아갈때 안변에서 기생을
데리고 경성으로 간것이라는 등의 일이라고 아뢰며 그것이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유를 들어 김종서를 옹호한다.

이 말을 듣고 세종도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종서의 공이 크니 그를 움직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나서 전지하기를 "경은 움직일 마음을 갖지 마라. 만일 병이
있다면 근신해서 조섭하고 다시 더 심력을 다하여 그 직무에 충실하고
삼가도록 하라"

세종은 일단 이렇게 김종서에 대한 신임을 재확인하여 그를 안심시키기는
하였지만 그 참소내용을 그대로 덮어둔다면 오히려 김종서의 마음을 불안
하게 할 것이고 그 입장도 떳떳지 못하게 될것 같아 아예 이 기회에 그
참소하던 내용을 공표하고 김종서를 내직으로 불러올릴 생각을 한다.

그래서 1월 19일에 도승지 김돈을 다시 불러 이렇게 말한다.

"김종서의 공은 작다고 할 수 없다. 새 백성들을 어루만져 모으고 여러
종족들을 불러 항복받아서 동북 한 지방으로 하여금 편안하고 조용하게
하였으니 이는 그가 세운 큰 공이다. 박호문은 본래 경박한 사람이다.
예전에 겸사복이 되었을때 최윤덕과 환관 인수가 다투어 그 용맹을 칭찬
하였고 파저강에 사신을 보낼 만한 인물을 뽑는데도 대신이 역시 호문을
추천하였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언어동작이 날렵하고 영리한 때문이었다.
종서도 역시 추천하므로 회령 절제사를 삼았었는데 회령으로부터 돌아왔기에
내가 북변의 일을 묻고자 하여 내전에서 불러 보았더니 호문이 이렇게
아뢰었다.

"종서는 겁많고 나약하여 장수로는 합당치 않은데 또 활쏘고 말타는 것은
그가 잘하는 바가 아니라 다만 야인에게 위엄을 뽐내려고만 할 뿐이니 능히
뭇사람의 마음을 굴복시킬수 있겠습니까. 이징옥은 위협하여 제압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여 오도리족과 등진지가 오래입니다. 아마 경원으로 옮기지
않았었더라면 그 형세가 반드시 서로 용납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은
오로지 회유하는 것만을 일삼았으므로 이에 범찰(범찬)과는 사랑하기를
형제같이 하였고 범찰 역시 신을 사랑해서 부락이 평안했었습니다. 범찰은
또 종서도 싫어했습니다. 감사는 마땅히 문신을 써야 하고 장수는 마땅히
무신을 써야 하니 징옥으로 종서를 대신하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종서가 사실은 호문을 천거했었는데 호문은 이에 도리어 종서를 참소하여
해치기를 이와같이 하는구나. 그러나 내가 묻는 것으로 말미암아
말하였으므로 나는 죄를 주지 않았었다. 징옥이 사납다고 하면서도 이에
도절제사를 삼았으면 하였으니 그 말의 변하고 거짓됨이 이와 같다. 너는
그것을 알아두어라. 종서의 공은 심히 커서 소인이 능히 이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지금 막 새로 이주한 백성들이 4진에 모여드는 때를
당하였다면 종서는 교체할 수 없다. 그러나 4진이 이미 안정되었고 그 공은
이미 이루어졌는데, 외방으로 나가 진무한지 이제 이미 7~8년이나 되어
집안 일을 돌보지 못하였으니 또한 불쌍하다. 장차 도절제사가 될 만한
인물을 택하여 부장을 삼아 종서로 하여금 친임하게 하려고 하는데 매사를
같이 의논하여 변방 방비하는 일을 익히면 종서를 대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병조판서 황보인, 참판 신인손과 더불어 의논하여 장수될 만한
자를 아뢰어라"

그래서 의주목사 이양(?~1453)등 여러 사람이 천거되었으나 김종서가
친임해야 하므로 일단 인선을 보류한다.

그러나 세종은 김종서를 서울로 불러 올릴 생각을 굳혔으므로 6월 19일에
좌승지 성념조(1398~1450)에게 명하여 의정부와 영의정 황희(1363~1452)의
집에 가서 김종서를 대신할 만한 인재를 비밀히 의논하여 천거하라고 하니
모두 좌부승지 이세형을 천거한다.

한편 박호문은 참소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제2 계책으로 회령부근에
터잡고 사는 오도리족 추장 범찰과 동창을 꼬드겨 6월 26일에 관하 3백여호
를 이끌고 동가강가에 사는 이만주에게 달아나도록 함으로써 그 책임을
김종서가 덮어쓰게 한다.

더구나 이들로 하여금 장차 명나라 조정에 조선이 유인하고 협박하므로
달아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소하겠다는 소문을 내게 하자 세종같은 현군도
일시 이 계략에 넘어가 김종서를 문책하여 해임하고자 한다.

그래서 7월 5일 인순부윤 김돈과 도승지 성념조를 불러 보고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로부터 변방의 장수가 되어 허물이 없는 사람은 드물었으니 한나라
조충국이나 당나라 이정, 고려 윤관(?~1111)등이 모두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도 마침내 물의를 일으켰었고 근래에 최윤덕 성달생 하경복도 변방을
맡겼었더니 끝내 허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허물을 모두 불문에
부쳤었다. 이는 변방의 장수를 중시하여 모든 것을 위임했었기 때문이다.
김종서는 본래 유신으로 몸집도 작고 무예에 능치 못하며 인사행정에
능해서 장수가 되기에는 마땅치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일에 임해서 근면
성실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정밀하고 상세한 것을 취했었을 뿐이다. 4진을
신설할 때 처리를 올바로하여 그 효과를 빠르게 한 것은 포상할 만한
일이라 작은 허물이 있었더라도 거론하지 않았는데 이제 야인에게 위엄과
용맹으로만 대하고 너그러움을 베풀지 않아 배반하여 도망하게 하였으니
부끄러운 일이며 장차 중국에 웃음거리를 주게 되었다. 경등은 우의정 신개,
우찬성 하연(1376~1453)과 의논하여 김종서와 이사증의 해임 가부를
아뢰도록 하라"

그러나 세종대왕은 역시 현군이었다.

성군으로의 자부심이 강하였기에 여진족을 잘못 다스려 명나라에 그들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렸으므로 화가 나서 잠깐 총명이
흐려졌었지만 곧 이 모든 사건들이 박호문의 반간책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자신이 가장 믿을만 하고 김종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병조판서 황보인을 평안.함길 양도 도체찰사로 삼아 현장에 파견하여
여진족의 도주 상황을 조사하게 하고 7월 13일에는 도승지 성념조와
우부승지 이승손을 사정전으로 불러서 박호문이 오도리족 추장 범찰과 교결
하여 김종서를 궁지로 몰아넣은 죄를 묻는 것이 어떻겠는가 의논해 아뢰라고
한다.

박호문이 김종서를 참소하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기 위해 세종에게 늘어
놓았던 얘기와 범찰이 달아난 사실을 연계시켜 바로 그 실상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박호문은 범찰과 의형제를 맺어 범찰을 형이라 하였으며 범찰은 호문에게
"자네가 있으면 나도 있겠지만 자네가 가면 나도 도망가겠다"고 하면서
호문이 병들자 문병와서 울기까지 하였다고 자랑했었다.

그리고 김종서는 힘센 무사도 아니고 활쏘기나 말타기도 잘 못하면서
성질이 조급하여 야인을 심히 엄하게 대하므로 야인들이 미워하여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한다고도 말하였었다는 것이다.

비장이 되면 응당 원수와 동심협력하여 이적을 대하는 방법을 한결같이
함으로써 한 지방을 안정시키는 것이 그 직분인데 도리어 원수와 이적을
이간시켜 끝내 배반해 도망가게 하였으니 해당 관청에 내려 그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세종의 뜻이었다.

성념조는 신개 하연등과 의논하고 평안.함길 양도 도체찰사인 황보인이
돌아오면 회령 방어의 잘못을 상세히 알 수 있을 터이니 그가 돌아온 이후에
국문하자고 아뢴다.

드디어 7월 17일 황보인이 평안도와 함길도를 살펴보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김종서의 서찰을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서 박호문의 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박호문이 상호군 조석강(?~1444)을 시켜 자신이 세종께 김종서를 참소했던
내용을 김종서에게도 세종 모르게 귀띔한 사실과 박호문이 회령에서
토목공사를 거창하게 벌이다가 김종서에게 제지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참소한 전말 등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세종은 자신이 박호문에게 일시나마 농락 당하여 김종서를 해임시키려
했었던 사실에 자괴감을 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박호문이 김종서에게 자신이 참소한 내용을 몰래 전하여 군신을
이간한 사실을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도 자책이
앞섰던것 같다.

그래서 그 다음날인 7월 18일에 의정부로 하여금 박호문의 추국여부를
상의하여 아뢰라 하고 즉일로 의금부에 전지하여 그 죄상을 추국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7월 18일에는 김종서에게 전지를 내려 박호문의 참소에 농락당한
경위를 자세히 알리고 세종 자신은 누가 어떤 참소를 한다 해도 김종서를
절대 신임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직무에 충실하라고 하면서 박호문은 지금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고 있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한다.

얼마나 미안했던지 김종서도 그들의 간계에 빠져서 대응을 잘못한 것은
실수가 아니겠느냐며 세종 자신의 실수만 탓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내용으로 전지를 마감한다.

국문한 결과 박호문의 죄상은 참수형에 해당하는 중죄로 밝혀져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는데 세종은 그가 독자이고 파저강의 이만주 정벌때 세운 공이
있다하여 한 등을 내려 목숨만은 살려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