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군왕이 칙지를 선포하고 나자 관원들이 조대감의 지시를 받아
몇몇은 가사를 오랏줄로 묶어 관청으로 끌고 가고,나머지는 가사의
집으로 몰려가서 재산들을 차압해갈 채비를 하였다.

갖가지 물품들을 상자에 넣기도 하고,장농 같은 큰 물건들은 동앗줄로
묶기도 하였다.

관원들을 뒤따라 가사의 집으로 달려온 가씨가문 사람들은 그 기막힌
광경에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저희 형님인 가사 대감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사건의 전말을 알아보고 황제 폐하께 상소문을 올려보겠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재산 차압은 보류해주십시오"

가정이 조대감과 서평군왕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사정해보았다.

"여기 보시오. 고리대금 차용증서들이 가사 대감의 방에서 무더기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조대감이 관원들이 찾아 들고 온 차용증서들을 가정에게 내보였다.

가정은 그 물증을 보자 아무 할말이 없었다.

조대감은 재산 차압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서 가씨 가문 남자들을
하인의 방으로 몰아넣고 관원들로 하여금 감시를 하도록 하였다.

바깥에서는 가사의 아내 형부인과 다른 부인네들이 시녀들과 더불어
흐느끼며 통곡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북정군왕이 행차하였다는 하인들의 고함소리가 났다.

가정은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북정군왕이면 이토록 가씨 가문에 대하여 무자비하게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조금 있으니 가씨 가문 남자들이 풀려나 북정군왕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가정이 북정군왕에게 예를 표하며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가정 대감, 너무 염려 마시오. 서평군왕과 조대감이 일을 조급하게
서둘러 내가 일단 제지를 해놓았소.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가사
대감의 죄는 숨길 수 없으므로 거기에 따른 벌은 받아야 할 것 같소.

다만 재산 차압은 나중에 죄가 밝혀지고 벌이 확정되고 나서 시행해도
늦지 않으므로 그리 하도록 서평군왕과 조대감에게 일러놓았소.

그 대신 앞으로 차압당할 가사 대감의 재산 목록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가정 대감이 기록을 해놓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나라도 숨기면 저의 재산까지 차압해 가셔도
할말이 없습니다"

가정은 당분간만이라도 재산 차압이 보류된 데 대해 황송해 하며
허겁지겁 가사의 방으로 달려가 재산 목록을 꼼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