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면서도 고달픈 자리"

지난해 3월 (주)쌍용의 사령탑에 오른 안종원사장은 종합상사 사장직을
이렇게 표현했다.

안사장은 대학졸업과 동시에 (주)쌍용에 입사해 25년간 상사맨으로 외길을
달려온 인물.

따라서 종합상사 사장의 보람과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법하다.

그런 그가 왜 종합상사 사장자리가 화려하면서도 고달픈 자리라고
했을까.

종합상사 사장의 이면을 한번 살펴보자.

우선 화려한 측면.

종합상사는 매출액이나 수출규모면에서 초거대기업이다.

다른 업종의 회사와는 비교가 안된다.

작년의 경우 매출액기준 국내 1백대 기업중 1위가 삼성물산, 2위가
현대종합상사였다.

뒤이어 (주)대우가 4위, LG상사는 5위.

상사중 외형이 제일 적다는 효성물산도 29위에 올랐다.

수출에서도 7개 상사의 실적은 우리나라 전체의 절반정도를 차지한다.

그만큼 영업망도 광범위하다.

7개 상사들의 해외지사수는 70여개국에 4백여개.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와 거래관계를 맺고 있다.

"해가 지지않는 기업"이라는 별칭도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

자연 사업영역도 광범위 할수밖에 없다.

주업인 도매업에서부터 각종 제재업 출판업 식음료업 컨설팅업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를 망라한다.

신세길 삼성물산사장은 그래서 종합상사 사장자리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제각기 다른 음색을 가진 악기로부터 하모니를
끌어내는 것처럼 상사사장도 서로 성격이 다른 사업부를 조화있게
끌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합상사 사장직은 스케일과 다양성을 함께 필요로하는 자리다.

경영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런 거대기업의 사령탑에 앉아 보길
꿈꿔볼만 하다.

하지만 이것은 외양일 뿐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선 그들은 누구보다 바쁘다.

올해 해외출장기록을 보자.(주)쌍용 안종원사장의 경우 1백50일로 1년의
거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냈다.

또 (주)대우 강병호사장은 21차례에 걸쳐 1백일간 23개국을 돌아다녔다.

지난 9월에 취임한 효성물산 백영배사장도 불과 석달새에 4차례에 걸쳐
20여일간 해외현장을 누볐다.

이렇게 해외로 돌다보니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도 늘 부족하다.

그래도 이런류는 인간적 애환에 속할 뿐이다.

업무자체가 주는 중압감도 엄청나다.

"사방에 대고 아쉬운 소리만 해야 하는게 상사 사장이다"

올해 무역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한 (주)대우 강병호사장은 상사
사장직을 단적으로 이렇게 평가절하(?)했다.

매출액기준으로 국내 4위인 거대기업 사장의 이같은 푸념은 언뜻 믿어지지
않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조업체나 유통업체 사장 같으면 납품업체들에라도 큰 소리를 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아니다.

제조업체에 가서는 수출대행을 부탁해야 하고 바이어한테는 물건을
사가라고 사정해야 하는 판이다"

특히 올해처럼 수출이 부진할 경우 상사 사장들은 더욱 고달파진다.

수출실적이 신통치 않으면 정부는 상사부터 닦달을 해댄다.

"상사라고 해서 묘안이 있는게 아닌데도 말이다"(S상사 관계자)

상사사장들이 외형에 비해 자칫 심약해지기 쉬운 이유는 또 있다.

덩치에 비해 수익성이 형편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7개 종합상사의 매출액대비 경상이익률은 겨우 평균 0.3%.

제조업의 10분의1 수준이다.

상사의 영업실적을 두고 "속빈 강정"이라는 혹평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제조업체의 수출입기능이 강화되면서 소위
"상사무용론"까지 대두되고 있다.

전에는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이 해외마케팅 능력이 없어 상사들의 신세를
졌다.

이제는 웬만한 중소기업까지도 스스로 시장개척에 나서 상사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신만이 살 길"이라는 박세용현대종합상사사장의 구호는 곧 생존을
위한 절규인 셈이기도 하다.

때문에 요즘 상사 사장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수익기반을 찾느냐"하는 것이다.

"출장을 다니더라도 어느것 하나 무심히 보게 되질 않는다.

지난번 호주 출장을 갔을 때는 우연히 돼지농장을 지나다가 우리도
이곳에서 돈육가공사업을 벌이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무진에게
검토를 지시했다"(강병호사장)는 식이다.

상사 사장들의 이런 변신의지는 "탈상사"로 표현되곤 한다.

"상사=무역업"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위해 종합상사라는 용어대신
"종합기업",또는 "종합회사"를 즐겨 쓰는게 요즘의 상사 사장들인 것이다.

< 임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