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제니퍼의 크리스마스 카드 .. 임사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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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소설 아카데미 친구들과의 정규 모임날이었다.
제니퍼라는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 내게 신문 한부를 던져 주었다.
해외란에 한국 기사가 실려있었다.
몇 줄 안되는 기사였지만 다혈질인 제니퍼가 왜 그렇게 격앙된 표정으로
그 신문을 말아 쥐고 왔는지 알만 했다.
신문을 돌려가며 읽은 친구들은 의분을 금치 못했다.
하버드 스퀘어 찻집의 명물인 자스민 차는 탁자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고 나는 졸지에 진땀을 흘리며 그 기사에 대한 설명 아닌 변명을 늘어
놓아야 했다.
"여자애가 백말띠 해에 태어나면 팔자가 세다고 낙태를 시킨다는 거야?"
한국의 무지한 남아선호 사상이 빚어낸 낙태문제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신문에까지 활자화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 퀴리부인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구.
헬렌 켈러는 팔자가 좋았대?
그러다가 테레사 수녀같은 성녀를 죽이면 어떻게 해!"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간 추앙 받는 여성들은 동양적인
여성관으로 보자면 하나같이 팔자가 센 여자들이었다.
제니퍼는 동양의 무속 신앙을 연구하며 동남아의 미개한 원시 문명까지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신비한 오리엔탈 문화로 동경하던 친구였다.
그러나 그 문제만큼은 동양의 고유 풍습이나 사상으로 넘길 수 없다는
완강한 태도였다.
요즘처럼 태아 성감별을 해준 의사들을 구속시켰다는 기사가 그때 함께
실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 날 그들의 공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며칠전 나는 그 날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흥분한 제니퍼와 만나게 되었다.
바로 최현실씨 가족의 탈북 기사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아버지 최영도씨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에 이런 휴머니스트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아들도 아닌 딸을 잊을 수 없어, 17명이라는
대가족의 목숨을 건 탈출극을 시도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도 80 고령의 노인이...
정작 최현실씨 본인은 공포감 때문에 아들만 데리고 탈출하려고 했는데
그 노인이 다 함께 와야 한다고 지휘를 했다쟎아."
제니퍼는 북한의 식량난이니, 김정일 체제의 붕괴 조짐이니 하는 정치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 편의 소설같은 용감한 그들의 탈출 경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감격한 것은 오직 최영도씨의 줄기찬 부성애였다.
어쩌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당연한 사랑조차 외국인인 제니퍼에게 감동을
주는 나라가 되었는지 서글프기도 했지만 최영도씨는 새삼 한국의 아버지상을
세계에 심어준 것이다.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생각해 보았다.
제니퍼의 말대로 한국적인 끈끈하고 질긴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사선을
넘은 최현실씨 같은 강인한 딸들이 있기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허리잘린
이 나라에도 여전히 희망의 태양이 뜨는 것이리라.
아마 최영도씨는 올 크리스마스에 얼굴도 모르는 제니퍼라는 외국여자로
부터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게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 대탈출을 성공시킨 당신의 용기있는 결단이야말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메시지입니다''라고 적힌...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4일자).
제니퍼라는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 내게 신문 한부를 던져 주었다.
해외란에 한국 기사가 실려있었다.
몇 줄 안되는 기사였지만 다혈질인 제니퍼가 왜 그렇게 격앙된 표정으로
그 신문을 말아 쥐고 왔는지 알만 했다.
신문을 돌려가며 읽은 친구들은 의분을 금치 못했다.
하버드 스퀘어 찻집의 명물인 자스민 차는 탁자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고 나는 졸지에 진땀을 흘리며 그 기사에 대한 설명 아닌 변명을 늘어
놓아야 했다.
"여자애가 백말띠 해에 태어나면 팔자가 세다고 낙태를 시킨다는 거야?"
한국의 무지한 남아선호 사상이 빚어낸 낙태문제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신문에까지 활자화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 퀴리부인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구.
헬렌 켈러는 팔자가 좋았대?
그러다가 테레사 수녀같은 성녀를 죽이면 어떻게 해!"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간 추앙 받는 여성들은 동양적인
여성관으로 보자면 하나같이 팔자가 센 여자들이었다.
제니퍼는 동양의 무속 신앙을 연구하며 동남아의 미개한 원시 문명까지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신비한 오리엔탈 문화로 동경하던 친구였다.
그러나 그 문제만큼은 동양의 고유 풍습이나 사상으로 넘길 수 없다는
완강한 태도였다.
요즘처럼 태아 성감별을 해준 의사들을 구속시켰다는 기사가 그때 함께
실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 날 그들의 공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며칠전 나는 그 날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흥분한 제니퍼와 만나게 되었다.
바로 최현실씨 가족의 탈북 기사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아버지 최영도씨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에 이런 휴머니스트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아들도 아닌 딸을 잊을 수 없어, 17명이라는
대가족의 목숨을 건 탈출극을 시도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도 80 고령의 노인이...
정작 최현실씨 본인은 공포감 때문에 아들만 데리고 탈출하려고 했는데
그 노인이 다 함께 와야 한다고 지휘를 했다쟎아."
제니퍼는 북한의 식량난이니, 김정일 체제의 붕괴 조짐이니 하는 정치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 편의 소설같은 용감한 그들의 탈출 경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감격한 것은 오직 최영도씨의 줄기찬 부성애였다.
어쩌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당연한 사랑조차 외국인인 제니퍼에게 감동을
주는 나라가 되었는지 서글프기도 했지만 최영도씨는 새삼 한국의 아버지상을
세계에 심어준 것이다.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생각해 보았다.
제니퍼의 말대로 한국적인 끈끈하고 질긴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사선을
넘은 최현실씨 같은 강인한 딸들이 있기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허리잘린
이 나라에도 여전히 희망의 태양이 뜨는 것이리라.
아마 최영도씨는 올 크리스마스에 얼굴도 모르는 제니퍼라는 외국여자로
부터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게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 대탈출을 성공시킨 당신의 용기있는 결단이야말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메시지입니다''라고 적힌...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