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된 거류민단체이다.
작년말 현재로 68만여명의 재일동포중 조총련계 20만여명을 제외한
약 40만명을 대표하고 있다.
한일합병 전해인 1909년에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은 모두 수백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유학생이었다.
그러나 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재일조선인의 수는 230여만명에 달했다.
재일조선인 수가 35년간에 이처럼 증가한 것은 일재의 식민지 정책으로
농민층의 몰락에 따른 도일 (1910~1938)과 징용 등 강제연행에 의한
도일 (1939~1945) 등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140여만 동포가 귀국했고 47년말 현재 여러가지 사적으로
약 60만명이 잔류했었다.
이들이 지금의 재일동포 사회를 구성하는 근간이다.
그런데 재일동포 사회역시 좌.우익의 대립으로 분열상을 겪게 된다.
45년 10월 재일조선연맹을 결성했으나 대회 이틀째 공산계 청년들이
대회장에 난입해서 자유.민족진영 인사들을 감금하고 김천해를 중심으로
공산주의자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에 자유.민족주의자들은 46년 10월 박열을 단장으로 재일조선인
거류민단을 결성했고 49년 1월 주일 한국대표부가 설치됨에 따라 재일
한국거류민단으로 명칭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단 초기엔 조총련에 비해 숫자가 열세했으나 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에 힘입어 대등한 위치를 차지했고 75년 "조총련 동포
고향방문사업"을 계기로 우위에 올라섰다.
민단의 주요 활동방향도 시대상황에 따라 변해 한일국교정상화 전후엔
영주권 신청운동에 주력했었고 70년대와 80년대는 지문날인철폐운동등
각종 차별철폐운동을 전개했으며 90년 이후는 일본사회 및 조총련과
"공존공생"을 모색하는 장기적이고 유연한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지방참정권 획득운동으로 일본 지방의회중 38%가
이 운동에 지지 결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민단의 근본적 고민을 뿌리의식이 강한 1세인구가 격감하고
귀화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단은 우리말교육, 짝지어주기 행사, 한국춘하계학교 등 2.3세들에게
올바른 한국관을 심어주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하고 있다.
세계화.정보화시대에 일본 등 해외동포들의 역할을 한층 기대된다.
우리는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일본사회에서
존경받는 제일동포사회를 건설"할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겠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