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니노이 아퀴노 국제공항에서 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두시간.

야자수의 멋을 즐기기보다는 무섭게 찌는 더위에 겁부터 먹어야 할
정도.

우리의 60년대 시골길 같은 엉성한 도로에 가득찬 치프니와 트라이시클의
끝없는 행렬.

필리피노들의 환한 웃음과 마닐라만의 풍광을 뒤로 하며 닿은 곳은
카비테주의 로사리오에 있는 카비테(Cavite) 수출자유무역국립공단.

여기에 맥슨시스템 필리핀사가 자리잡고 있다.

무선전화기와 키폰시스템을 생산, 전세계에 공급하고 있는 맥슨
시스템 필리핀은 맥슨전자의 필리핀 현지법인으로 9월말 현재 14개국
15개 국내외법인중 올해 매출목표액 1억2,000만달러와 3,500여명의
고용인력 등 그 규모에 있어 최대를 자랑한다.

9,000여평의 부지 위에 자리한 공장에서는 아침 7시에서 오후 4시반,
저녁 8시에서 다음날 새벽 4시반까지 등 하루 2교대로 무선전화기와
키폰시스템이 라인을 타고 쏟아져 나온다.

라인을 타고 이어지는 무선전화기를 만지는 필리핀 여성인력들의
손놀림은 문외한이 보아도 무척이나 숙달된 솜씨다.

우리나라 굴지의 공장과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는 쾌적한 환경의
근무여건과 분위기다.

"무선전화기 단일공장으로서는 세계 최대"라는 유원필이사의 설명에
자긍심과 함께 힘이 들어 있는 것도 이때문인가 보다.

그러나 맥슨 시스템의 강점은 겉으로 나타난 수치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

갖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기업의 필리핀 진출에 있어 "첨병"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고 해외에 진출하는 우리 기업이 어떻게 현지에
자리잡아야 하는가 하는 전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맥슨 시스템이 카비테공단에 둥지를 튼 것은 지난 89년 1월.

7년반이 지난 지금은 무려 320여개의 해외기업이 들어와 있지만 89년
당시에는 전기와 수도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맥슨은 이 곳을
선택했다.

내로라하는 우리 대기업들도 필리핀의 정치상황이나 경제여건 등을
생각할 때 진출을 꺼리던 때였다는 것이 이민종과장의 설명이다.

"악조건일수록 찬스는 더 있다"

첫 삽을 뜰 때부터 회사를 지켜온 박선종부장의 이 말처럼 맥슨 시스템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기초를 다져갔다.

지난 90년 2,000만달러였던 매출은 올들어 9개월만에 1억달러를
넘어섰고 800여명에 불과하던 현지 고용인력은 사세 확장으로 4배로
늘어나게 됐다.

우리 기업들의 필리핀 진출에 있어 맥슨 시스템 필리핀은 "교과서"로
통하고 있다.

필리핀을 그만큼 아는 기업이 없다는 이야기다.

맥슨 시스템 필리핀은 올초 "체제개혁"을 단행했다.

완전한 별도 법인화를 이룬 것이다.

서울 본사의 지휘 감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된 자금운용과 구매,
영업을 하게 된 것이다.

더 좋은 물건을 개발하고 더 많은 물건을 내다 팔기 위해서는 기동성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데 매사를 본사와 협의하다가는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같은 전략은 물론 멋지게 맞아 떨어져 올초 잡았던 매출목표 1억달러를
20%나 상향 조정하는 개가로 이어졌다.

이같은 도약을 발판으로 맥슨 시스템 필리핀은 모두 1,000만달러를 투자,
공장 자동화에 박차를 가해 내년 상반기까지 인력을 2,000여명선으로
줄인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으나 한솥밥을 먹던 상당수 인력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 최근 스태프들이 안고있는 커다란 숙제가 됐다.

맥슨 시스템 필리핀의 또다른 애로는 현지의 기상조건.

한 해에 평균 25개의 태풍이 필리핀을 지나가는데 아무리 방비를 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을 정도의 큰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

지난해 11월 공장 전체를 강타한 태풍 "로싱"은 1주일간 작업을 못하게
만들어 수십만달러의 클레임을 당해야 했고 열흘동안 모든 직원들이 복구에
나서 간신히 정상을 되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맥슨 시스템 필리핀의 회의실에는 필립 라모스대통령과 코라손 아퀴노
전 대통령이 공장을 방문, 직원들을 격려하는 사진이 걸려 있다.

필리핀인들의 맥슨에 대한, 그리고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상징물인 셈이다.

"총성없는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오늘의 국제무역 환경에서 맥슨
시스템 필리핀사의 계속되는 도약은 결국 "한국의 저력"으로 필리핀에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 양승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