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퇴직이란 말은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지만 잘 만든 말은 못된다.

"명예"라는 어휘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100% 본인들의 선택에 의한 퇴직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민주니 정의니 하는 어휘들을 내세웠던 정당들이 실제로는 반민주적이고
부도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명예퇴직은 그 당사자나 회사 모두가
명예스럽게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걸맞는 명칭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대우 LG에 이어 삼성 현대 등 대기업그룹들이 "명예퇴직을 실시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하고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우리 경제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 그룹들의 움직임이 확산돼 40,
50대의 실업증가추세에 제동이 걸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명예퇴직을 실시하지 않겠다는 기업중 상당수는 이를 실시한 기업들이
앓고있는 후유증, 곧 사원들의 사기저하 등 부작용이 예상보다도 훨씬
크다는 점을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평생직장"으로 알고 밤낮 가리지 않고 회사를 위해 뛰던 사원들 입장에서
보면, 비록 자신이 포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명예퇴직 등 대량감원에 대해
허탈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회사일에 대한 정열이 전같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바로 그런 사원들의 정서가 보이지 않는 비용으로 작용, 경영에 새로운
부담을 낳고 있다는 게 명예퇴직을 실시한 몇몇 기업 경영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사원들의 사기는 생산성을 가늠하는 가장 큰 요인이고, 그것이 회사의
공식적인 조직관리 보다는 비공식적인 인간관계 분위기 등에 영향받는다는
것은 경영에서 일반화된 인식이다.

이는 하버드대 메이요교수팀이 지난 24년부터 8년간 시카고 교외 웨스턴
일렉트릭사 호손공장에서 실시한 이른바 인간관계 실험에서 입증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기업풍토는 일본처럼 종신고용제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지만, 경제개발이 본격화한 지난60년대 이후 도산하지 않은 대기업에서
대량감원을 실시한 적은 없었고 비교적 고용안정이 이루어져왔던 편이다.

작년 이후 불고있는 이른바 리스터럭처링 바람과 올 하반기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한 불황이 겹쳐 나타나고 있는 명예퇴직 확산 등 대량감원이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량감원 바람이 언제까지 어느 정도로 불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 경제가 앓고 있는 불황이 구조적이라고 본다면 쉽게
가라앉으리라고 낙관하기 어려운 측면이 오히려 강하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작년 이후 확산되기 시작한 명예퇴직제 등은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추세일
수도 있다.

도요타 등 일본의 대표적인 대기업중 일부가 종신고용제를 바꿀 움직임을
공식화하고 있다는 점도 그런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동양적인 온정적 경영의 시대는 가고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않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싫건 좋건간에 고용풍토가 바뀌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정리해고제를 제도화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다는 것도 바로 그런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경제에서 논리나 명분이 실제로 별 의미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경제는 결국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 세력설의 신봉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반증하는 사례로 즐겨 내세우는게 세제다.

응능부담의 원칙이 적용되는 세금부담의 형평성을 위해서는 전체 세금
징수액중 소득세의 비중이 높아야 하고, 또 소득세율은 다단계의 누진구조로
짜여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게 이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소득세율 구조는 갈수록 단순화되는 추세다.

영국의 대처정권, 미국의 레이건행정부 등 단일 소득세율을 들고나왔던
보수정권 이후 그런 추세는 세계화되고 있다.

각국에서 부가가치세 등 소비세 중심의 간접세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징세편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소득역진적이라는 점에서
소득세율 단순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추세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고 일본의 경우는 내년중으로
예정된 소비세율 인상문제가 이번 총선에서도 적잖은 논란을 부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세금부담이 힘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는 사람들의 시각으로 평가한다면
정부가 이번 정기국회에 내놓은 세법개정안은 문제투성이이기도 하다.

상속 증여 등 자산계층과 관련된 세금부담을 대폭 줄이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등으로 상속재산에 대한 실질적인 과세가 가능해졌다고
보면 명목상 존재했지만 거의 내지않던 상속세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만만치 않은게 세력설의 신봉자들이다.

계층간 갈등의 불가피성을 실제 이상으로 확대해서 받아들이는 이들이
그들이다.

명예퇴직제든 다른 명칭이든 대량해고가 확산된다면 사회적인 마찰음이
어느나라보다 클 소지가 충분하다.

"미국의 어느 회사는 수천명도 한꺼번에 감원한다"는 식의 논리로
사회적인 충격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절대로 금물이다.

경영자와 근로자가 서로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보는 슬기가 긴요하다.

그저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고 역겨워할지도 모른다.

정말 우울한 계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