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민칼럼] 정당과 국회의 입법기능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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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국회란건 좋은 것이다"
80년대 초반 그 암울했던 시절, 국회가 허울뿐이었던 그때도 우리
경제기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국회가 열릴 때마다 의원 요구자료가 무척이나 많았고, 거기서 비정이
드러나는 알멩이 있는 자료들이 나오기도 했으니까...
이제 곧 열리게 될 96년 정기국회에 그때의 그것과 비슷한 정도의
기대밖에 갖지 못한다면 문제다.
어쩌면 민주화된 사회의 그 모든 것을 규율할 수 있는 막강한 국회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를 다루는 국회의 자세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지난 여름 임시국회 때도, 또 작년 정기국회 때도 회기 마지막날
무더기로 법률을 쏟아놓은 것은 그 옛날 모습과 달라진 것이 없다.
얼마나 진지한 심의과정을 거쳤는지 도무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입법의 초기과정부터 따져보면 국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노동관계법 공정거래법 증권거래법 등 올해 임시국회에서 다뤄져야
할 법률안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른바 "정책정당"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길조차 없는게 현실이다.
국회가 입법부가 아니라 통법부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입법과정은
파행적일 수밖에 없다.
거의 100% 관료들이 만든 안이 그대로 되게 마련이고 보면 처처에
행정편의적 자의성이 강한 조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입법예고-관주최 공청회-국회제출-원안통과로 정형화된 우리 입법
과정은 문제다.
이른바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공청회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하게 되는 "각계전문가" 중 실질적인
이해당사자의 비중은 지극히 낮은 것이 보통이다.
그나마 5~20분내 1회에 한해 자기 의견을 개진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토론이 될 턱이 없다.
"시간 관계상 끝내겠다"는게 모든 공청회에서 사회자가 예외없이
하는 말이다.
공청회를 거치면서 정부원안이 달라지는게 없는 것도 공통적이다.
국회 상임위에서 며칠씩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다면 아마도 얘기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국회의원들이 국회운영을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 옳은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입법부 기능이 정상화되려면 본회의장에서 대정부질문에 사자후를
토하는 의원보다 법안 한조목 한조목을 더욱 꼼꼼히 따지는 의원이
많아야 할 것은 물론이다.
미국처럼 법에 제안의원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정당과 정치인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복수노조 정리해고 등 뜨거운 현안을 담고 있는 노동관계법에 대해
여야 각당이 너무도 조용한 것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것은 여당내 경남북 의원들이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위천공단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고, 거의 모든 사업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수 있다.
말을 하게 되면 표를 잃을 지도 모르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임있는 정당이라면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설혹 표를 잃는다고 보더라도 그렇다.
미국 공화당이 이번 전당대회에서 낙태금지를 정강에 반영한 것도
그런 사례라고 볼수 있다.
득실을 따지면 잃는 것이 더 많을지라도 정책방향을 분명히 하는
정당, 그런 정당이 있어야 정치가 건전해진다.
"정책방향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표면화된 쟁점에 대해
찬반을 밝히라는 뜻만은 아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풀이한다면 글자 그대로 "방향"을 밝히고, 이를
국민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라면, 잠재돼 있는 문제를 표면화시키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정당이 주도적이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복수노조 교원노조 등 금지됐던 사안들을 푸는 문제를 논의한다면
그 주체가 당이 돼야 할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냉정하게 사리를 따지면, 노개위와 같은 민간전문가들의 모임에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을 맡겨놓고 뒷짐을 지는 자세는 책임있는
정당이 할 일이 아니다.
왜 노사관계 제도 전반을 재검토해야 하는지, 꼭 지금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집권여당은 뭔가 말이 있어야 한다.
보수정당이건, 진보적 색채를 띤 정당이건 그 컬러는 경제정책을
통해서만 분명해진다.
물론 보수정당이라고 해서 항상 비개혁적이고 현실안주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시대가 변하면 달라질 수 있다.
독일의 사회보장제도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보장하는 영국 사회보장제도가 처칠의 보수당집권 때
도입된 것도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득표에 장애요인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들의 주도적인 판단에
따라 명확히 반대하고, 상황이 달라져 이를 수용할 여건이 됐을 때
능동적으로 채택했던 책임있는 정치였다고 볼수 있다.
노사관계법 공정거래법 등 경제 전반에 대변화를 몰고올 수도 있는
법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는 정당들, 그래서 20억+알파 시비만
요란할 정기국회.
"그래도 국회란건 좋은 것이다"는 생각이나마 간직하려면 애당초
기대치를 낮추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같아 씁쓸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4일자).
80년대 초반 그 암울했던 시절, 국회가 허울뿐이었던 그때도 우리
경제기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국회가 열릴 때마다 의원 요구자료가 무척이나 많았고, 거기서 비정이
드러나는 알멩이 있는 자료들이 나오기도 했으니까...
이제 곧 열리게 될 96년 정기국회에 그때의 그것과 비슷한 정도의
기대밖에 갖지 못한다면 문제다.
어쩌면 민주화된 사회의 그 모든 것을 규율할 수 있는 막강한 국회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를 다루는 국회의 자세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지난 여름 임시국회 때도, 또 작년 정기국회 때도 회기 마지막날
무더기로 법률을 쏟아놓은 것은 그 옛날 모습과 달라진 것이 없다.
얼마나 진지한 심의과정을 거쳤는지 도무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입법의 초기과정부터 따져보면 국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노동관계법 공정거래법 증권거래법 등 올해 임시국회에서 다뤄져야
할 법률안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른바 "정책정당"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길조차 없는게 현실이다.
국회가 입법부가 아니라 통법부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입법과정은
파행적일 수밖에 없다.
거의 100% 관료들이 만든 안이 그대로 되게 마련이고 보면 처처에
행정편의적 자의성이 강한 조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입법예고-관주최 공청회-국회제출-원안통과로 정형화된 우리 입법
과정은 문제다.
이른바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공청회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하게 되는 "각계전문가" 중 실질적인
이해당사자의 비중은 지극히 낮은 것이 보통이다.
그나마 5~20분내 1회에 한해 자기 의견을 개진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토론이 될 턱이 없다.
"시간 관계상 끝내겠다"는게 모든 공청회에서 사회자가 예외없이
하는 말이다.
공청회를 거치면서 정부원안이 달라지는게 없는 것도 공통적이다.
국회 상임위에서 며칠씩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다면 아마도 얘기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국회의원들이 국회운영을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 옳은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입법부 기능이 정상화되려면 본회의장에서 대정부질문에 사자후를
토하는 의원보다 법안 한조목 한조목을 더욱 꼼꼼히 따지는 의원이
많아야 할 것은 물론이다.
미국처럼 법에 제안의원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정당과 정치인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복수노조 정리해고 등 뜨거운 현안을 담고 있는 노동관계법에 대해
여야 각당이 너무도 조용한 것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것은 여당내 경남북 의원들이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위천공단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고, 거의 모든 사업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수 있다.
말을 하게 되면 표를 잃을 지도 모르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임있는 정당이라면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설혹 표를 잃는다고 보더라도 그렇다.
미국 공화당이 이번 전당대회에서 낙태금지를 정강에 반영한 것도
그런 사례라고 볼수 있다.
득실을 따지면 잃는 것이 더 많을지라도 정책방향을 분명히 하는
정당, 그런 정당이 있어야 정치가 건전해진다.
"정책방향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표면화된 쟁점에 대해
찬반을 밝히라는 뜻만은 아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풀이한다면 글자 그대로 "방향"을 밝히고, 이를
국민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라면, 잠재돼 있는 문제를 표면화시키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정당이 주도적이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복수노조 교원노조 등 금지됐던 사안들을 푸는 문제를 논의한다면
그 주체가 당이 돼야 할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냉정하게 사리를 따지면, 노개위와 같은 민간전문가들의 모임에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을 맡겨놓고 뒷짐을 지는 자세는 책임있는
정당이 할 일이 아니다.
왜 노사관계 제도 전반을 재검토해야 하는지, 꼭 지금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집권여당은 뭔가 말이 있어야 한다.
보수정당이건, 진보적 색채를 띤 정당이건 그 컬러는 경제정책을
통해서만 분명해진다.
물론 보수정당이라고 해서 항상 비개혁적이고 현실안주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시대가 변하면 달라질 수 있다.
독일의 사회보장제도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보장하는 영국 사회보장제도가 처칠의 보수당집권 때
도입된 것도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득표에 장애요인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들의 주도적인 판단에
따라 명확히 반대하고, 상황이 달라져 이를 수용할 여건이 됐을 때
능동적으로 채택했던 책임있는 정치였다고 볼수 있다.
노사관계법 공정거래법 등 경제 전반에 대변화를 몰고올 수도 있는
법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는 정당들, 그래서 20억+알파 시비만
요란할 정기국회.
"그래도 국회란건 좋은 것이다"는 생각이나마 간직하려면 애당초
기대치를 낮추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같아 씁쓸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