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과 정책당국은 구호를 무척 좋아하고 그것도 내용이 없거나
의미가 매우 모호한 구호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5공시절에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구호는 "선진조국창조"였는데
창조라는 말의 의미는 분명하나 "선진조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밝힌 일이 없으며, 능력부족의 탓이겠지만 필자는 아무리
고심하여도 그 의미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그 많은 연설문과 정책발표에서의 내용이 없거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선진조국"에 끌려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였다.

다소 다른 맥락이나 최근에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과소비"
란 말이다.

과소비란 말을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제 분석에는 없는 용어일 뿐더러 사태의 본질을 은폐하고
의도하는 목적에 상응하는 대책의 강구를 어렵게 하는 혼동과 혼란
조작적 용어이다.

학문적 논의에서는 물론이고 정책적 논의에서도 중요한 것은 내용이
분명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정확히 인식하는 용어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인데 과소비와 같은 애매모호한 기치를 내걸고 무엇을
어떻게, 무엇 때문에 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우리 국민 어느 누구를 잡고 물어 봐도 아무도 자기 스스로 과소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과소비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과소비가 의미할 수 있는 내용을 통상적 기준으로 정리해 보면
"과다한 소비" "과분한 소비" "지나친 소비" "과시소비" "사치성
소비" 등이 될 터인데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과소비란
말을 상기의 내용 중 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수단과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이며 둘째는 어느 의미로
받아들이든 간에 각각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 내용이 크게 심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과소비라 하면 자기의 소득수준을 넘는 소비지출을
하는 경우라 인식할 터인데 문제는 전지전능한 신을 제외하고는 현실의
인간 중 자신의 소득수준을 넘는 소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저축의 일부를 소비에 충당할 수 있으므로 특정 기간에 그
기간의 소득보다 많은 지출이 가능할 것이나 장기간에 걸쳐서 보면
우리 모두 자신의 소득범위 내에서만 지출이 가능하며 자기의 소득을
넘는 과소비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소비, 그리고 사치품에 지나친 지출을 하는
사치성 소비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과시적이냐, 무엇이 사치적이냐 하는 것은 일견 기준이
분명한 것 같으나 개개인의 소득과 직업 등을 고려한 여건을 참작하면
그 기준이 매우 모호하다.

과시소비와 사치소비도 그 나름대로의 사회적 기능을 하며 경제적
합리성을 갖고 있다는 것 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소비란 말의 의미론적, 사전적 설명을 통하여 학자연하려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 아니며 오늘날 우리 국민의 소비성향과 소비행태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특히
사안이 국가정책과 관련되어 있을 때는 의미 없는 구호의 외침으로
내용의 본질을 호도하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과소비하지 말자고 기치를 내세우기 보다는 앞으로는 근검절약하고
저축을 많이 하자는, 누구에게나 관련이 있고 사회와 개인에게 실질적
으로 도움이 되고 와 닿는 기치를 내걸도록 하자.

오늘날 우리 국민의 소비행태에는 정말로 문제가 많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외제품을 선호하고 향락산업이 번창하고
교통 여건과는 반대로 대형 중형 승용차가 거리에 홍수를 이루고
고급 음식점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등 일부 계층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이 지상의 낙원이다.

우리 국민의 소비행태와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문제가 있는 소비든 정상적
소비든 모든 소비가 소득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소득의
원천과 내용을 살피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얻은 소득, 예를 들어 땀흘려 얻은 근로소득이 문제성
있는 소비로 지출될 여지는 극히 적다.

특혜금융 부동산투기 사채놀이 등의 불로소득이 과시적 소비, 사치적
소비, 향락적 소비로 쉽게 지출된다.

따라서 과소비를 사회지탄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고 각종 불로
소득을 지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불로소득의 증대와 소득과 부의 편재가 오늘날의 소비열풍과 향락산업
번창의 중요한 원인이다.

따라서 경제질서정책과 조세정책을 통해 불로소득의 발생을 억제하고
발생된 불로소득을 사회로 환수하는 것과 분배의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각종 병폐를 치유하는 첩경이다.

구호 외침, 그것도 내용이 없는 구호의 외침은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보고 이를 정확히 나타내는 용어를 제대로
사용할 때만이 국가정책이 올바르게 수립될 것이다.

앞으로는 과소비란 용어 자체가 적어도 국가정책 논의에서는 사용되지
말기를 제안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