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일터로] (22) 제3부 : (인터뷰) 박윤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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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밤샘도 불사하는 노력을 지녀야 해요.
제 경험에 비춰보면 학교 졸업후 10년이상 현업에 종사한 뒤라야
"디자이너"로 불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패션전문교육기관 "에스모드서울"의 박윤정교장(64)은 대학졸업(55년 이화
여대) 직후부터 지금까지 40여년간 디자이너와 패션교육자로서 외길을
걸어온 국내 패션계의 중진이다.
"64년 미국연수(메이어패션학교)시절 무척 놀랐어요. 전공이 뭐냐고 묻기에
옷에 관한 모든 것을 한다고 말했죠. 한달이 지나서야 그들이 의아해 한
이유를 알았어요"
60년대에 국내디자이너는 A부터 Z까지 옷만들기의 모든 것, 그리고
디스플레이와 운송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디자인은 스타일화그리기 패턴제작 재단등으로 세분돼
있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의상제작이 좀더 전문화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66년 귀국과 동시에 개인부티크 "미스박테일러"를 열어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수준 기성복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89년 오랜 꿈이던 패션디자인
교육기관 에스모드서울을 열었다.
"우리 교육은 이제 겨우 스틸리즘(스타일화그리기)과 모델리즘(패턴제작
하기)이 구분된 단계죠. 앞으로 과정을 보다 세분화할 필요가 있어요.
에스모드서울의 학과는 3개인데 반해 프랑스파리 본교에는 14개의 학과가
있죠"
그의 가장 큰 꿈은 에스모드서울에서 세계적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것.
"요즘엔 부모님의 격려를 받아가며 공부할 만큼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지만 정작 인내심은 좀 떨어졌어요. 학생들이 들으면 옛날얘기라고
하겠지만 디자이너가 되려면 정말 고된 수련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계속된 일 때문에 결혼할 시간이 없었다"는 그가 후배들에게 주는 아픈
일침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일자).
제 경험에 비춰보면 학교 졸업후 10년이상 현업에 종사한 뒤라야
"디자이너"로 불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패션전문교육기관 "에스모드서울"의 박윤정교장(64)은 대학졸업(55년 이화
여대) 직후부터 지금까지 40여년간 디자이너와 패션교육자로서 외길을
걸어온 국내 패션계의 중진이다.
"64년 미국연수(메이어패션학교)시절 무척 놀랐어요. 전공이 뭐냐고 묻기에
옷에 관한 모든 것을 한다고 말했죠. 한달이 지나서야 그들이 의아해 한
이유를 알았어요"
60년대에 국내디자이너는 A부터 Z까지 옷만들기의 모든 것, 그리고
디스플레이와 운송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디자인은 스타일화그리기 패턴제작 재단등으로 세분돼
있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의상제작이 좀더 전문화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66년 귀국과 동시에 개인부티크 "미스박테일러"를 열어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수준 기성복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89년 오랜 꿈이던 패션디자인
교육기관 에스모드서울을 열었다.
"우리 교육은 이제 겨우 스틸리즘(스타일화그리기)과 모델리즘(패턴제작
하기)이 구분된 단계죠. 앞으로 과정을 보다 세분화할 필요가 있어요.
에스모드서울의 학과는 3개인데 반해 프랑스파리 본교에는 14개의 학과가
있죠"
그의 가장 큰 꿈은 에스모드서울에서 세계적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것.
"요즘엔 부모님의 격려를 받아가며 공부할 만큼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지만 정작 인내심은 좀 떨어졌어요. 학생들이 들으면 옛날얘기라고
하겠지만 디자이너가 되려면 정말 고된 수련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계속된 일 때문에 결혼할 시간이 없었다"는 그가 후배들에게 주는 아픈
일침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