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7일 저녁 8시 서울 호텔롯데 특설대국실.

한국과 일본의 두 젊은이 사이에 명암이 엇갈리고 있었다.

흑백의 돌들이 빼곡이 채워져 있는 바둑판을 앞에 두고 일본의 유키 사토시
9단은 무어라 자책의 말을 되뇌이며 자신의 머리를 계속 쥐어박고 있었다.

그 맞은 편에는 약관(스무살)의 한국 기사가 흐뭇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허리를 쭉 펴고 있었다.

최명훈 4단.

최명훈은 올해 처음 창설된 세계 최고규모의 바둑대회인 "LG배 세계기왕전"
에서 중국의 창하오 7단과 일본의 유키 9단을 차례로 꺾고 당당히 8강에
올라 돌풍의 주인공이 됐다.

특히 이 두 젊은 기사는 각자 자기 나라에서 차세대 리더로 꼽히고 있는
신진강호들이어서 이번 대국은 더욱 의미가 깊었다.

최명훈의 최근 성적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명인전 본선에서 도전자결정전까지 올라 서능욱 9단과 도전권을 놓고
다투고 있으며(먼저 1승을 올린 상태) 기성전 본선리그에서는 전승으로
조훈현 9단을 제치고 선두를 달리고 있다.

6월말까지의 성적은 33승9패.

이창호 조훈현 등 초일류급 기사를 빼면 그와 바둑을 둬 이긴 기사는
거의 없다.

따라서 LG배에서의 성적도 사실은 이변아닌 이변일 뿐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최명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늦어도 20대 초반까지는 타이틀을 따야 프로기사로 대성할 수 있습니다.

안그러면 후배들에게 처질 수밖에 없는거죠"

담담한 그의 말속엔 가슴깊이 품고 있는 야무진 꿈의 한자락이 숨어 있다.

"내친 김에 타이틀을 따고 싶다.

그것도 세계 최대기전에서 첫 타이틀을 따고 싶다"는.

최명훈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중.고등학교에 가봤자 제대로 공부를 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럴 바에야
프로기사 생활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는 군 입대를 면제받는게 낫지
않겠느냐고 아버지 최오준씨가 권유해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포기한 뒤에 그의 인생에는 오직 바둑만이
있을 뿐이었다.

"기원에 나와서 배우고 공부하다가 또 집에 가서 공부합니다.

하루에 최소한 10시간씩은 했습니다"

이 시절 그는 승부세계의 비정함을 맛보게 된다.

한국기원 원생생활은 입단이라는 좁은 문을 뚫기 위해 좋아하는 친구나
형 동생들을 딛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는 적자생존의 세계였다.

바둑을 이기면 날듯이 기쁘고 지고나면 한없이 가슴아파하던 시절이었다.

"바둑을 지는 날이면 울면서 밤길을 돌아옵니다"고 어린시절 조치훈이
일본에서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듯이 최명훈도 어린 나이에 승부를 배워야
했다.

이젠 어느 정도 가슴에 굳은 살이 박혔을까.

승리에 자만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는 법도 배웠다.

"큰 시합을 놓치고 나면 무척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잊으려 해요.

어차피 남은 시합이 더 많지 않습니까"

그는 요즘 자신감에 차 있다.

그야말로 누구와 둬도 질 것 같지 않다.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최고수" 이창호와 둬도 자신있느냐고 물어봤다.

"글쎄요.

"말끝을 흐리면서도 "바둑을 두기 전에는 누구나 그런게 아닐까요"라며
멋적게 웃는다.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실력을 닦아 왔기에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프로기사 최명훈.

아직 앳된 모습이 채 가시지 않은 이 젊은이는 세계제패를 꿈꾸고 있었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