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언홍이 보옥의 거처인 이홍원 근방 소산 기슭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 것일까.

밤마다 그 우물에서 여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돌고 할 무렵,
하루는 보옥이 달이 밝은 밤에 이홍원 뜰로 나가 이미 죽은 불알 친구
진종을 떠올리며 시월이 되면 진종의 묘소에 성묘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저쪽 석류나무 아래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그림자의 실체가 어디에 있나 하고 두리번거려보아도 사람이나
짐승 같은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림자의 실체가 보옥 바로 옆에 다가와 있었다.

보옥은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아앗"

보옥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밤마다 귀신으로 나타난다는 언홍이었다.

"도련님, 놀라지 마세요.

이승과 저승이 그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도련님이 방문 하나를 열고 여기 뜨락으로 내려섰듯이 그렇게 저승에서도
방문 하나만 열면 이승이랍니다.

이승에서도 방문 하나만 열면 저승이고요"

그러면서 언홍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런데 하필 왜 나를 찾아왔어요?"

큰아버지의 첩이었던 언홍인지라 보옥은 높임말을 써주었다.

"저승에 가서 여기 영국부를 내려다보니 말이에요, 가장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이 도련님이었어요.

그래서 밤마다 소산 우물 근처를 배회하며 이홍원으로 들어가 볼까
하였지만, 도련님이 놀라실 것 같아 망설이고만 있었죠.

그런데 오늘밤은 달이 너무 밝아 이홍원 뜰이 그림 같지 뭐예요.

그래 나도 모르게 발길이 여기로 향해졌어요"

언홍은 다시금 교교한 달빛에 젖은 이홍원 뜰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한층 성숙해지는 법인가.

그런 언홍의 모습은 살아 생전의 이팔청춘이 아니었다.

누나와도 같고 어머니와도 같아 그 품에 한번 안겨보고 싶기도 했다.

언제인가 보옥이 꿈인지 환상인지 경환 선녀를 따라가 경환 선녀의
동생 겸미를 안았던 기억을 떠올리며,저승에서 온 언홍과도 그런 달콤한
시간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승에서 큰아버지의 첩이었던 여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저승에서는 어떤 인척관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요.

인척관계가 존재한다면 스무 살에 죽은 아버지와 여든 살에 죽은
아들의 상봉이 어색하기 짝이 없을 거예요.

저승에서는 나이를 초월하여 모두 환한 몸, 환신으로 살지요"

언홍은 보옥의 속생각을 읽은 듯 저승의 자유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옥과도 인척관계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