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단종때 충청도 문의현에 김미라는 부자가 살았다.

그의 집은 109간이나 됐는데, 집 가운데 "진루"라고 부르는 높은
눅가을 세우고 그 양쪽에 잇대어 여러개의 밀실까지 만들어 첩과
기여들이 손님을 모시게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이미 그의 부인과 딸들의 방에는 호화판 욕실이
딸려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그의 창고는 "진고"라고 불렀고 동구의 다리위에 문을 만들어
"술 마시기를 숭상하지 않는 사람은 이 문을 들어 올 수 없다"는
액판을 달아놓았다니 그의 허랑방탕했던 생활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인륜도덕과 근검절약을 숭상하고 사치를 악으로 알았던 유교국가에는
있을법 하지도 않는 이야기같지만 500년전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근래 혼인하는 집을 보면 비단과 보석은 우리나라 토산물이아닌데도
꼭 그것을 쓰려고 하며...."

성종 4년 (1473) 이극기가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개탄하며 올린
상소를 보면 그때 이미 사대부가에서는 밀수품인 중국산 혼수가 오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라의 제도가 완비되고 사대부들이 기를 펴게되어 문풍이 진작되어가던
성종초에는 왕실척족과 훈구대신계층에 사치풍조가 유달리 만연한다.

사대부가에서 청화백자를 쓰지 않고 집이 좁으면 행세를 못하는
사치풍조가 휩쓸어 중국산 청화자기 사용을 금지시키고 사대부의 집은
30간을 넘지 못하게 단청을 못하게 엄격히 규제할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치풍조는 연산군대에 오면 극에 달해 사족 부인이 돈피 갖옷이
없으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프랑스의 고급 사치품제조업자들의 단체인 "콜베르위원회"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향수 핸드백 등 이들 상품의 대한 수출액이 70%나 급증
했다고 한다.

프랑스 상인들에게 한국은 "황금의 땅"으로 불린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지난 4월 방한했던 영국의 관광청장이 "돈 잘쓰는 무소불재의 사람들"
이라고 한국인의 헤픈 돈 씀씀이를 비꼬았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금년말이면 총외채가 1,000억불을 넘는다는 "빚대국"이 외국인에게는
"황금의 땅"으로 여겨질 만큼 돈을 잘쓰는 나라가 됐다면 결코 정상적인
것은 못된다.

"사치"라는 전염병은 "건망증"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안분지족"을 이상으로 삼았던 생활태도를 우리는 언제부터 잊은
것일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