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기아자동차 노사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자 일단 한숨을 돌리면서도
타결 내용을 두고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하나는 근무시간을 ''주당 42시간''으로 합의했다지만 실제로는 41시간으로
줄였다는데 있다.

근로시간단축 문제가 올 임.단협의 최대 이슈로 부상한 가운데 그동안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주 42시간이 사실상 깨진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다.

또 하나는 기아가 종업원들에게 사실상 "작업중지권"을 허용했다는 사실
이다.

재계는 작업중지권이 재해위험을 빌미로 작업거부나 태업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기아자동차는 지난 20일 파업중인 노조와 잠정 합의안을 도출하면서 "주
42시간 근무와 격주 휴무제 채택"을 골자로 한 올 단체협약 잠정 합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사실상 소정 근로시간을 주 41시간으로 줄인
것이라는게 노사관계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기아 노사는 잠정 합의안에서 한달 네번의 토요일 가운데 <>첫주는 4시간
근무 <>둘째주는 4시간 근무하되 특근처리 <>셋째 넷째주는 휴무한다는
내용에 의견을 같이했다.

정상적인 토요 근무는 사실상 한달에 첫주 토요일 한 번 만으로 줄인
셈이다.

이 회사 노무관계자는 "애초에 노조측 요구는 주 40시간이었다"며 "주
42시간의 기조를 흔들지 않고 노조측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선에서
절충안을 택한 것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노조 관계자는 "노조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조의 노력이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주 41시간제를 도입한 것으로 자인했다.

기아는 지난 94년에도 국내 대기업 최초로 주 42시간 근무제를 도입, 국내
근로시간 단축 논쟁에 불을 댕겼었다.

기아가 "주 42시간 체제"를 사실상 깨뜨림에 따라 다른 자동차 업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는 지난 94~95년에도 기아에 영향받아 앞다퉈 근로시간을
줄였었다.

기아 계열의 아시아가 곧바로 주 42시간제를 도입했고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는 95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각각 주 42시간제와 주 43시간제
를 도입했다.

국내 최대의 자동차부품업체인 만도기계도 지난해부터 주 42시간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노조들이 대부분 주 40시간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아의 주 41시간은 악재"라며 자사에 불똥이 튀지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올 주 42시간제 도입건을 놓고 막판 협상을 벌이던 쌍용자동차
노사는 20일 내년 1월1일부터 도입키로 거의 합의할 뻔 했으나 기아자동차가
사실상 41시간제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갑자기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가 갑자기 당장 42시간제를 실시하자고 나왔기 때문이다.

오는 24일께 단체협상을 앞두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경우도 노조가 그동안
주장해온 "주 40시간 근무"와 "작업중지권"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돼 노사간
갈등의 골이 깊어질 전망이다.

지난 8일 쟁의신고를 마치고 이미 10일간의 냉각기간을 끝낸 대우자동차의
경우도 노조측이 주 40시간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마찬가지로 비상이
걸렸다.

업계 관계자는 "파업을 조기 수습하겠다는 기아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만
동종업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했어야 했다"며 기아측에 화살을 돌렸다.

자동차업계만 긴장하는게 아니다.

기아가 "선뜻" 양보한 작업중지권도 문제다.

실제로 창원의 효성중공업은 21일 작업중지권을 도입키로 합의했다.

민노총(민주노조총연맹)이 올해부터 새로운 단체협상 카드로 내놓은 작업
중지권은 현장에서 위험사태가 발생할 것이 예상될 때 현장 근로자가 즉시
작업중지를 선포할 수 있다는 것.

노조측은 근로시간 단축건과 마찬가지로 작업중지권이 현장 근로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권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영계는 작업중지권이 태업이나 파업등 분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자동차 업계 노조와 대부분의 민노총계 세력이 작업중지권
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아가 물꼬를 터준 꼴이 됐다"면서 작업중지권
요구가 전 노동계로 확산될 것을 걱정했다.

자사 노조가 민노총 계열에 속한 기업의 노무담당자들은 민노총이
기아자동차의 잠정 합의안을 즉시 전국 사업장에 팩스로 송부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자칫 마무리 단계에 온 단협이 깨지거나 재협상을 요구할 것이 우려돼서다.

실제로 올들어서만 민노총 계열에 속한 10여개 사업장 노사가 주 42시간제
도입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실제 근무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데도 소정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은 결국 편법적인 임금 인상에 불과하다"며 "경기
하강국면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시기상조"
라고 말했다.

< 권영설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