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20일자) 한 군수 고백의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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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떼죽음으로 난리가 났음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강물에 독을 푼
철면피 공장주를 보고 괘씸한 마음을 달래기가 어렵던 참에 어제 한 신문에
보도된 "어느 군수의 고백"은 새삼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쾌하게
떠올렸다.
취임 1년을 바라보는 민선 군수가 떡값 상납에서 군청의 차량연료 구입,
청소용역, 직원의 나이롱 휴가에 이르는 온갖 서정이 모두 관행을 내세워
썩어 있고, 그것을 쇄신하려는 자신에게 음해성 소문이 나돌아 한때 현실과
타협을 하려고도 했으나 여기서 멈출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다는
익명의 고백은 우리 사회병리의 깊은 데를 잘 고발했다.
이번 한탄강 사건을 포함, 판에 박은 부조리와 사건-사고가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원인이 그 민선 자치단체장의 길지 않은 체험담 속에 응축되어
있음에 놀란다.
다시 말해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법을 짓밟아도 끄떡없도록, 오히려 법을
법대로 지키고 집행하는 사람은 시선에 압도돼 배겨내기 힘든, 관행이란
미명의 먹이사슬의 주범임을 느끼게 만든다.
잠시 한탄강 오염으로 되돌아 가자.
하천유역에 밀집한 가죽제품 등 유해업소들이 공해물질을 강물에 내쏟는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항다반사로 자행돼 온 배경은 무엇인가.
정화조청소 이권을 한 업자에게 독점시켜 오더라는 군수의 고백에
그 시사도 나타나 있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되는가.
무엇보다 비싼 약품을 써가며 배출물을 법대로 정화하는지 여부에 대한
당국의 감독이 유명무실해진다.
독점업체-관청간의 오랜 유착관계로 현장조사를 할때 그 시간을 업주에게
사전 통보해 줌으로써 대비케 만든다.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사정이 하천오염에만 국한한다면 그래도 괜찮다.
고치기 쉬우니까.
그러나 불행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상하 대소 모든 규제에
따라다니는 그림자다.
관청의 규제가 하나같이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탄생함에도 그 철폐요구가
어디서나 드센 이유는 성과보다 부작용이 더 큰 이유에서다.
사실 그런 계획적 오염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행위에
대하여는 관청이 규제를 들고 끼어들지 않고 피해자의 배상청구에 맡김이
더 효과적이라는 극단적 비유도 가능하다.
만일 가죽제품 원가에 배출물 정화비용을 부가하고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할때 그 공장은 문을 닫는 것이 순리이지, 관청과 야합으로 원가를 낮춰
사업의 길을 터주는 것이 규제의 정체가 아닌가.
나아가 이런 행정차원의 모순은 보다 고차원, 또는 저차원의 모순을
동행하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고차적 모순은 주로 국회나 선거에서 발로되는 정치적 불합리이고,
저차원이란 흔히 사회병리를 규탄하며 자행되는 청소년의 반항적 범죄가
그 예일수 있다.
정치엔 명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즘처럼 갈수록 겉모양과 체면치레로 중점을 옮겨가는 정치의
가치체계는 위험을 동반한다.
위만 쳐다보고 나가다가 발밑에 커져가는 사회파괴 공동에 발이 빠질
위험이 점점 더 커온다.
선진국이란 양보다 질적 개념임을 망각하지 말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0일자).
철면피 공장주를 보고 괘씸한 마음을 달래기가 어렵던 참에 어제 한 신문에
보도된 "어느 군수의 고백"은 새삼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쾌하게
떠올렸다.
취임 1년을 바라보는 민선 군수가 떡값 상납에서 군청의 차량연료 구입,
청소용역, 직원의 나이롱 휴가에 이르는 온갖 서정이 모두 관행을 내세워
썩어 있고, 그것을 쇄신하려는 자신에게 음해성 소문이 나돌아 한때 현실과
타협을 하려고도 했으나 여기서 멈출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다는
익명의 고백은 우리 사회병리의 깊은 데를 잘 고발했다.
이번 한탄강 사건을 포함, 판에 박은 부조리와 사건-사고가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원인이 그 민선 자치단체장의 길지 않은 체험담 속에 응축되어
있음에 놀란다.
다시 말해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법을 짓밟아도 끄떡없도록, 오히려 법을
법대로 지키고 집행하는 사람은 시선에 압도돼 배겨내기 힘든, 관행이란
미명의 먹이사슬의 주범임을 느끼게 만든다.
잠시 한탄강 오염으로 되돌아 가자.
하천유역에 밀집한 가죽제품 등 유해업소들이 공해물질을 강물에 내쏟는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항다반사로 자행돼 온 배경은 무엇인가.
정화조청소 이권을 한 업자에게 독점시켜 오더라는 군수의 고백에
그 시사도 나타나 있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되는가.
무엇보다 비싼 약품을 써가며 배출물을 법대로 정화하는지 여부에 대한
당국의 감독이 유명무실해진다.
독점업체-관청간의 오랜 유착관계로 현장조사를 할때 그 시간을 업주에게
사전 통보해 줌으로써 대비케 만든다.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사정이 하천오염에만 국한한다면 그래도 괜찮다.
고치기 쉬우니까.
그러나 불행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상하 대소 모든 규제에
따라다니는 그림자다.
관청의 규제가 하나같이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탄생함에도 그 철폐요구가
어디서나 드센 이유는 성과보다 부작용이 더 큰 이유에서다.
사실 그런 계획적 오염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행위에
대하여는 관청이 규제를 들고 끼어들지 않고 피해자의 배상청구에 맡김이
더 효과적이라는 극단적 비유도 가능하다.
만일 가죽제품 원가에 배출물 정화비용을 부가하고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할때 그 공장은 문을 닫는 것이 순리이지, 관청과 야합으로 원가를 낮춰
사업의 길을 터주는 것이 규제의 정체가 아닌가.
나아가 이런 행정차원의 모순은 보다 고차원, 또는 저차원의 모순을
동행하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고차적 모순은 주로 국회나 선거에서 발로되는 정치적 불합리이고,
저차원이란 흔히 사회병리를 규탄하며 자행되는 청소년의 반항적 범죄가
그 예일수 있다.
정치엔 명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즘처럼 갈수록 겉모양과 체면치레로 중점을 옮겨가는 정치의
가치체계는 위험을 동반한다.
위만 쳐다보고 나가다가 발밑에 커져가는 사회파괴 공동에 발이 빠질
위험이 점점 더 커온다.
선진국이란 양보다 질적 개념임을 망각하지 말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