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잡하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하다.
민간기업의 구매행위를 놓고 정부차원의 협상을 벌인다는 것 부터가 WTO
(세계무역기구) 정신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국정부는 지난 4월초 한미 통신협의에서 한국을 통신협정 불이행국으로
지정하지 않기로한 대신 우리측이 예상치 못했던 난처한 요구를 내놓았었다.
한국의 민간 통신사업자들이 통신장비를 구매할때 한국산과 똑같은
조건으로 외국산 장비를 사주도록 한국정부가 보장하라는 요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같은 기습적 제의에 대해 우리측은 이 문제가 원천적으로 정부간
협의대상이 아니라고 일축하면서도 클린턴대통령의 방한이후 재론하자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었다.
바로 그같은 우유부단한 태도가 빌미가 되어 불필요한 이번 워싱턴
쌍무협상에 반강제적으로 끌려나가게 된 셈이다.
이번에도 미국측은 미국산 장비를 되도록 많이 사줄 것을 한국정부가
약속하는 양해록을 요구하고 있다고 들린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미국산 장비 구입시 기술이전 조건을 붙이지 말 것,
형식승인시에도 영업관련 정보제공을 요구하지 말것 등을 문서로써 보장해
주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군말말고 파는대로 사라고 고객을 협박하는 안하무인의 태도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만약 이러한 요구를 안들어주면 오는 7월1일을 기해 통신협정 불이행국으로
지정, 보복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미국정부의 이같은 억지논리는 한국의 27개 신규통신사업자가 2000년까지
구매할 5조원대의 통신장비물량을 노린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유선통신분야에서는 이제 배를 채울대로 다 채웠으니 새로운 무선통신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도다.
물론 정부나 정부투자기관의 조달물자에 대해서는 다자기구나 쌍무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논의할수 있다고 본다.
우리정부가 한국통신의 장비조달 입찰과 관련, 쌍무협상을 통해 미국측
요구를 들어준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민간기업의 외국산 장비구매를 정부가 보장하라는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정부가 민간기업활동을 좌지우지하는 미개한 나라쯤으로 여기는
모욕적 처사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정부는 말로만 "공세적 통상외교"를 펼치겠다고 큰소리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이를 실천해야 한다.
적어도 대미무역관계에 있어서만은 한국의 입장은 조금도 꿀릴게 없다.
한국은 미국의 제4위 수출시장으로 부상한 반면 작년 한국의 대미무역
적자는 62억7,300만달러를 기록했으며 올들어 지난 4월말까지 적자가
자그마치 33억달러를 넘어섰다.
그런데도 미국은 한국시장이 닫혀 있다고 주장한다.
억지도 보통 억지가 아니다.
이번에도 미국의 강압에 우리정부가 물러설 경우 무선통신장비 분야에서
이제 막 국산화의 걸음마를 시작한 국내통신장비산업은 싹이 트기도 전에
시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정부의 단호한 대응 의지와 치밀하고 설득력있는 협상전략이 요구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