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규 수협 석촌동지점장에겐 생일이 두번이다.

해방동이인 그의 호적상 생일은 4월19일.

그렇지만 그에겐 잊을수 없는 또다는 생일날이 존재한다.

26년전인 70년 6월12일 베트남의 곡창지대인 베리아반도지역.

그는 해병 청룡부대의 소대장으로서 베트콩 토벌작전인 "황룡작전"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낮12시 25분쯤 앞서가던 사병이 베트콩이 깔아놓은 부비추랩을 밟았다.

순간 꽝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20m이상을 날랐다.

잠시 기절했던 그는오른발과 양손에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인생이 뒤바뀌는 혼돈이 찾아왔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상이용사" 타이틀.

실은 오른발은 의족신세에 열손가락중 엄지손가락만 성한 상태인 중증
장애란 멍에가 씌워진 것이다.

이지점장의 두번째 인생은 이렇게 상처를 안고 시작된다.

이지점장의 인생역전 드라마는 "두번째 생일"이후 더 감동적이다.

상처에 멍들고 자책하는 여느 상이용사와 달리 그는 나라의 부름으로
베트남에 갔던청년장교 시절의 패기로 인생을 헤쳐나간다.

강릉상고와 경희대 상학과를 졸업한 이지점장은 전공을 살려 "경제활동에
기여하는게 호국하는 길"이라고 인생의 좌표를 설정한다.

그는 72년 대위로제대한뒤 전공을 살려 서울 망우동에서 주산.부기학원을
열었다가 10개월만에 문을 닫았다.

손발이 성하지 못한 것이 수강생을 모으는데 걸림돌이 됐기때문.

그는 실망하지않고 오히려 오기가 발동했다.

여러사람과 함께 일하는 직장에서 떳떳히 경쟁하면서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로 결심한 것.

자신의 장애등급이 1급이어서 보훈처도 취업을 도와줄수없는 처지였으나
백절불굴의 해병정신으로 이를 헤쳐나갔다.

이렇게 직장을 찾아 나설길 3년째. 그는 76년 독립문표 메리야스를 생산
하는 평안섬유에 처음 취직했다.

자신의 취직문제를 해결한 그는 이때부터 국가유공자나 유자녀의 취직에
앞장서는 등 상이용사사회에선 "살아있는 전설"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80년 수협으로 자리를 옮긴뒤에도 그는 정상인과 다를 바없이 승진의
길을 걸어왔다.

91년 방이동출장소장이 된 것과 지난해 석촌동 지점장이된 것은 장애인
으로 첫 금융기관 점포장이란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했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활용해온 것이 힘겨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귀띔한다.

자신이 장애인이란 점때문에 상대방이 쉽게 기억한다는 점을 재산으로
삼아 구김살없는 친화력으로 자기사람을 늘려온 것.

이지점장은 특히 20여년전 장교시절의 기백으로 조직을 관리,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다고 주위에선 말한다.

또 책상에서 일하지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사지가 불편하지만 발로뛰는 영업맨기질을 발휘, 점포보단 하루종일
고객의 사무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이지점장은 "6월이 오면 두번째 생일날이 총천연색 화면으로 떠오른다"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신세대들에게 올바른 국가관을 심어주는 노력이
아쉽다"고 말한다.

부상치료중 만난 부인 이옥순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두고있는데 서울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아들 형도군이 행정고시를 준비하고있어 국가를
위한 봉사자세를 갖고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워한다.

< 남궁덕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