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 다 지나가고 어느덧 구월로 접어들었다.

영국부와 녕국부, 대관원 사람들은 희봉의 생일 잔치 준비로 분주하였다.

희봉의 생일날인 초이튿날 대부인의 처소에 일가 친척들이 다 모였다.

대부인이 침상에 편한 자세로 누운 채 뜰에서 공연되는 "형채기"를
구경하다 말고 주위 사람들에게 분부하였다.

"오늘은 희봉의 생일이 아니냐.

오늘 만큼은 희봉이 편히 쉬며 즐기도록 너희들이 마음을 써주어라.

평소에 희봉이 집안 일로 인하여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그리고 희봉을 상석에 모셔 앉히고 술을 한 잔씩 올려 축하를 해주어라"

그러자 녕국부 가진의 아내 우씨가 희봉을 상석에 앉도록 하고는
맨 먼저 술잔을 올리며 농담조로 종알거렸다.

"그대는 일년 내내 어른들을 섬기고 집안 일들을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그대의 고생을 내 어여삐 여겨 진귀한 상품은 못 올린다마는 박주
한 잔 철철 넘치게 따라 올리니 이 잔을 비우도록 하여라"

희봉이 빙그레 웃으며 역시 농담조로 응대하였다.

"그대의 정성 기특하도다.

이왕 술잔을 올리는 김에 무릎을 꿇고 올림이 어떨꼬"

"어, 고얀지고. 어른 앞에서 그 무슨 말버릇이냐.

하지만 오늘은 너의 날이니 네 소원대로 내가 무릎을 꿇어주마"

우씨가 정말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리자 주위 사람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우씨 뒤를 이어 탐춘, 석춘, 영춘, 대옥, 보채 들이 술을 올렸다.

그들이 올리는 술을 다 받아 마시다보니 희봉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술에 취하게 되었다.

"아, 더 이상은 못 마시겠어요.

이러다가 내 생일날이 내 제삿날이 될 거예요"

하지만 시녀들과 할멈들도 희봉에게 술을 올리겠다고 야단들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술잔을 올릴 자격도 없다 이건가요?

희봉 아씨 너무 하세요.

우리 술잔도 받아주셔야죠"

그래서 할 수 없이 희봉은 그들의 술잔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희봉은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되더니 뜰에 놓인 연극 무대가
출렁이고 배우들이 비틀비틀 이상한 춤들을 추고 있는 듯이 보였다.

희봉은 마치 자기도 연극 배우가 된 것처럼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태어나 죽음이 일장춘몽이로다
생일잔치는 죽음을 마중하는 잔치일 뿐
아, 애달파라, 내 생일을 축하하던 사람들
내 장례식에도 모여 나에게 술잔을 올리리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