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 무너지면 미국 첨단산업도 흔들린다"

중국과 대만간 전운이 감돌던 지난달 미국재계에서는 이런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대만과 미국의 산업은 하나의 탯줄로 이어져 있는 탓이다.

미정부가 대만에 지원병력을 파견하면서 "첨예한 전략적 이해"가 걸려
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중 가장 큰 이해관계가 걸려있는게 굴뚝없는 미실리콘 밸리기업들.

대만반도체업체들은 자사공장을 두지 않고 있는 미칩업체의 총 생산량중
40%를 담당하고 있다.

대만세미컨덕터메뉴팩처링(TSMC), 유나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윈본드테크놀로지등 대만 반도체업체들은 이들 미칩업체들이 첨단제품을
개발하면 즉시 생산에 들어간다.

때로는 월 몇백개 정도의 소량생산에 그치는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단 본격적인 출시에 들어가면 이들 대만공장들은 월 10만개까지
단번에 생산량을 잡아늘릴수 있다.

그만큼 유연하다는 얘기다.

"대만기업들 덕분에 미 칩업체들은 시속 2백40Km로 달리는 화물열차위에
올라타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는 도널드 브룩스 TSMC사장의 자랑도 무리가
아니다.

미국의 반도체 업체 ESS테크놀로지는 미기업의 대만 의존도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지난 94년 ESS는 오디오 칩 시장에 뛰어들었다.

컴퓨터의 멀티미디어화가 본격화되면서 ESS의 16비트 스테레오 칩은
업계의 표준이 됐다.

이 회사의 매출은 순식간에 불어나서 95년 매출이전년보다 3배나 많은
1억6백만달러로 뛰었다.

이런 화려한 성공뒤에는 TSMC가 있었다.

TSMC가 ESS의 웨이퍼(반도체 핵심재료)공급을 1백%맡았던 것이다.

컴팩, 애플, 휴렛패커드등 자사공장을 갖고 있는 세계적인 컴퓨터업체들도
저가제품 생산을 대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미기업들의 노트북 컴퓨터선적은 당장 중단될
수 밖에 없다" (이안 다이어리 미AST리서치 최고경영자)는 우려가 나올
정도이다.

미국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대만은 전세계 전자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전세계 모뎀의 절반이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빛을 이용해 종이위에 기록돼 있는 화상정보를 입력하는 첨단전자장치
광스캐너의 경우 전세계 생산량의 64%가 대만산이다.

구역내통신망(LAN), 회로기판등도 대만이전세계 공급물량의 절반이상을
대고 있는 품목이다.

그러나 대만의 얼굴에는 아직 "기술대국"보다 "하청왕국"이란 오명이
더 짙게 배어 있다.

양적 기준으로는 전자산업의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
후진으로 밀려있는게 사실이다.

대만이 만들어내는 제품 대부분은 저가, 저기술 부품들이다.

그것도 하청제품들이라 대만업체들은 국제무대에서 "무명"신세에 불과하다.

대만업체들은 요즘 이런 무대뒷켠에서 나와 주역으로 나서기 위해 제2의
도약을 하고 있다.

대만기업중 에이서는 여기에 성공한 간판스타.

에이서의 가정용 PC제품 "아스파이어"는 지난해 미국내 컴퓨터 판매 7위를
기록했다.

오는 2000년까지 그룹매출을 1백억달러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대만 전자업계는 앞으로 다가올 디지털 혁명시대에는 일본기업들도 대만
도움없이는 힘들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응용분야가 워낙 광범위해 협력업체가반드시 필요"(조지 우앙 에이서
수석부사장)하기 때문이다.

대만이 아시아 첨단산업을 이끌어갈 차세대 선두주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등 동남아시아의 소위 "저코스트 생산천국"들은
고급엔지니어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이나 일본등 아시아 기술선진국은 산업구조가 대만만큼 유연하지
못하다.

중국 해안의 경제특구들은 하이테크 인프라스트럭처가 형편없다.

국제무대에서 주권국가로 인정조차 못하는 작은 섬나라 대만.

그러나 미국등 세계 각국이 강대국 중국과 약소국 대만간 갈등에서
주저없이 대만편에 손을 들어주는 이유는 이런 막강한 "경제적 지위"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