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과 대옥, 보채 사이에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습인이
우려하는 말을 듣고 왕부인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대옥이나 보채가 보옥의 배필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 이전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벌어지면 습인의 말마따나 가문의 체면이 말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보옥이 대옥도 건드리고 보채도 건드려 일이 복잡하게 얽혀버리면 누가
죽어 나가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아니, 왕부인 자신이 금천아처럼 우물에 먼저 빠져 죽을지도 몰랐다.

보옥은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것이고.

왕부인은 습인의 말에서 피비린내가 섞인 비극의 냄새를 얼핏 맡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냉정을 되찾고 습인에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보옥을 염려해주고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주니 고맙기
그지없구나.

보옥이 대관원에서 나오는 문제는 내가 집안 어른들과 의논해서 조처
하도록 하마.

사실 대관원에서 나오느냐 거기에 있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지
모르지.

문제는 보옥의 마음가짐이지.

마음가짐이 흐트러져 있으면 대관원에서 나와 있다고 해도 대관원을
들락거리면서 여전히 몹쓸 짓을 할 것이 아니냐.

마음가짐만 똑바르면 대관원 안에서도 얼마든지 말썽을 피우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습인이 네 역할이 더욱 중차대하구나.

제발 보옥이 마음을 잡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옆에서 잘 타일러주려무나.

가부간 때를 봐서 내가 조처를 취하마.

이제 돌아가도 좋다"

왕부인이 가만히 한숨을 쉬며 파초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습인은 향로병을 두 손에 들고 왕부인의 방을 나와 이홍원으로 향했다.

이홍원으로 오니 보옥이 잠에서 막 깨어나 마실 것을 찾고 있었다.

습인이 왕부인이 일러준 대로 장미즙에다 향로 한 숟갈을 타서 보옥에게
주니, 보옥은 이제 싱겁다느니 달지가 않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지 않고
코로 향내까지 맡아가며 맛있게 마시었다.

그렇게 장미즙을 한 잔 마시고 나니 몸의 통증도 약간 가라앉는 것 같고
정신도 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보옥은 희봉이 오는 바람에 뒷문으로 도망을 가다시피 빠져나간
대옥이 지금 자기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대옥에게 사람을 보내어 몸이 나아가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물론 대옥이 병문안을 왔을 때도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사람을 보내어
또 한번 그 말을 전함으로써 대옥에게로 향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습인이 그 사실을 알면 밤중에 어디로 사람을 보내느냐고 따지고
들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보옥이 한가지 꾀를 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1일자).